제7-3화 형태없이 남는 사랑

영화 드림스(Dreams, 2025, 미셸 프랑코)

by BEAU WOI

Michel Franco의 Dreams(2025)는 흔히 계급과 권력의 이야기로 읽힌다. 그러나 이 영화를 그 틀 안에만 가두는 것은 인물들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해석이다. 다양한 사랑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면, 감독이 연출하는 장면들이 단지 설정이 아니라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랑의 한 형태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런 사랑들 사이에서 고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 역시 어딘가에 분명 존재한다.

이 작품이 더 깊이 건드리고 있는 것은 선과 악으로 나뉘는 사회 구조가 아니라, 그 구조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이 사랑을 어떻게 다루는가에 대한 문제다. 세상에는 단순히 이분하여 나눌 수 없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역할과 책임을 수행하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정치가 아니라 감정으로 읽힐 때 더 깊어진다. 그리고 그 감정을 설득력 있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물들을 조건과 위치로 판단하기보다 어떤 방식으로 살아온 존재인가를 먼저 보아야 한다.


페르난도는 단순히 재능 있고 가난한 청년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몸과 타고난 재능으로 삶을 버텨온 사람이다. 움직이고, 감수하고, 밀어붙이며 살아온 존재다. 그의 사랑 역시 그 삶의 연장선 위에 있다. 그는 감정을 숨기지 않고, 자신의 전부로 표현한다. 이미 한 번 추방되었음에도, 그저 연인과 함께하기 위해 다시 국경을 넘는다.

제니퍼 역시 단순한 기득권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이 가진 환경을 영리하게 이용하며 그 안에서 역할을 수행하고 자리를 유지해온 사람이다. 그녀의 삶에는 개인의 욕망을 넘어서는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수많은 관계와 타인의 생존과도 연결되어 있다. 그녀는 그 안에서 선택해왔고, 그것을 지속해온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꽤 같은 방식으로 살아낸 존재들이다. 위치와 역할은 다르고, 표면적으로는 반대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더 나은 선택을 고민하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그리고 바로 발레라는 지점에서 만나게 된다. 나이 차이가 있음에도 서로에게서 매력을 느끼고 사랑이 발생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일반적인 서사와 다를 뿐이다. 이 관계를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많은 사람들이 결실과 형태를 갖춘 관계만을 사랑이라고 믿지만, 현실의 관계들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그런 사랑이 어떻게 흐려지고 망가지는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어떻게 다루어지는가에 있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것들은 오래 머물지 않는다는 말처럼, 이런 종류의 사랑을 그대로 유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있는 부분이다. 이 영화에서 제니퍼가 페르난도에게 발레 티켓을 제시하는 순간, 이 사랑은 전환된다. 욕망으로. 그것은 단순한 호의가 아니라, 사랑을 형태로 만들려는 시도다. “이 사랑을 내 물리적 세계 안에 두겠다”는, 말없는 선언이다. 이 순간부터 사랑은 더 이상 흐르는 감정이 아니다. 조건이 되고, 위치가 되고, 구조 속으로 들어간다. 시간적 한계를 가지는 감정으로 낮아진다.


아직 어린 페르난도는 형태적 위치를 원했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까지는 알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그저 살아있는 감정과 그 순수를 가진 인간이었다. 반면 제니퍼는 현실을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페르난도의 위치를 숨겨왔고, 감정을 조절해 왔다. 아마 그녀를 크게 흔든 것은, 페르난도의 사랑이 그 순수한 감정 그대로 국경을 넘어버린 그 사건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결국 제니퍼는 페르난도를 붙잡기 위해, 그 책임의 구조 안으로 스스로 들어가기를 선택한다.

이 선택이 잘못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들 그렇게 한다. 하지만 이 사랑은 애초에 어려운 사랑이었다. 그 순간부터 이미 예측 가능한 흐름이 시작된다. 시간적 한계를 가진 감정의 소모. 사랑으로 시작된 관계는 점점 서로의 책임으로 형태를 유지하려 하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소모된다. 이 구조는 낯설지 않다. 수많은 실패한 결혼에서 반복되어 온 방식이기 때문이다. 제니퍼 역시 그것을 몰랐을 리 없다. 결국 사랑은 조건이 되고, 위치가 되고, 구조가 됐다. 그리고 그 구조는 당사자에게 지속적인 책임을 요구한다. 감정은 더 이상 자유롭게 흐르지 않는다. 관리되고, 유지되어야 하며, 결국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분명, 처음 페르난도가 원했던 것은 단순히 함께 있음, 그리고 그에 따른 인정이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관계의 형태를 앞세우는 것은, 결과적으로 균열을 앞당기는 선택이다. 존재적 감정은 강력하지만, 그것을 형태로 구현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대가가 필요하다. 회피에서 해피엔딩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니퍼는 그 형태를 받아들인다. 아마 가능할지도 모른다고 믿었을 것이다. 애초에 사건과 같은 사랑은 드물고, 그래서 예술로 반복되어 이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진정 감정으로 함께 했을 때, 형태로는 늘 함께할 수 없었다. 그 감정은 국경을 넘는 힘으로 잠시 나타났지만, 만족할 수 없었다. 이제는 서로의 세계 안에서 지속되어야 했다. 감정의 영역에서, 구조의 영역으로. 이미 한쪽은 그 어려움을 알고 있었고, 줄타기를 하듯 균형을 유지하려 했지만, 결국 두 사람은 같은 판 위에 올라선다. 그리고 사랑이 형태로 구현되는 순간부터, 그것은 시간의 영향 아래 있게 된다. 변하고, 소모되고, 한계를 갖는다. 제니퍼가 페르난도에게 그가 원하던 발레 티켓을 직접 건네는 순간, 그 모래시계는 시작된 것이다.

이후 그들은 결국 다수의 길을 따른다. 많은 사람들이 마주치지만 실패했던 그 길.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다수는 실패하는 그 길을. 사랑은 욕망이 되고, 욕망은 과한 책임이 되고, 책임은 감정을 마모시킨다. 그리고 어느 순간, 무엇을 붙잡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게 된다.


제니퍼는 페르난도를 붙잡으려 했고, 그 과정에서 그의 꿈을 망가뜨린다. 페르난도는 그것을 이해하려 한다. 자신이 국경을 넘었던 것처럼, 그녀 역시 함께하기 위해 선택한 것임을. 그러나 자신의 가능성이 무너진 상태에서, 그 사실을 온전히 바로 받아들이는 것은 어렵고 그의 분노는 납득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분노는 결국 폭력으로 나타난다. 그는 감금이라는 방식으로 ‘함께 있음’을 강제하고, 그녀의 세계 일부를 훼손함으로써 균형을 맞추려 한다. 제니퍼는 함께 있음의 대가로 중요한 회의와 일을 놓친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 사이의 신체적 관계 역시 변한다. 이전의 접촉은 거칠었을지언정 감정의 흐름 위에 있었다. 감정이 앞서고, 그것이 몸으로 이어진 형태였다. 그러나 감금 이후의 행위는 전혀 다르다. 그 이전의 섹스가 감정의 흐름이었다면, 이 순간의 행위는 상대를 점유하고 지배하려는 방향으로 뒤틀린,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고, 그래서 제니퍼가 거부했던 것이다.

감정에 부수하는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것은 서로 이해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후에 따라오는 분노와 좌절까지 감당하기는 쉽지 않다. 그 과정에서 사랑의 형태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았다. 분노와 좌절로 변했고 흐려지고 바뀌었다. 그리고 결국, 제니퍼가 떠나는 순간에, 페르난도는 발레라는 가능성 자체를 잃는다. 제니퍼로부터 돌려받은 폭력.


이 영화를 보고 처음부터 사랑이 아니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편안한 관계로 가는 것이 사랑이라고. 그러나 그것은 사랑의 다양성과 힘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한 시선일 수 있다. 편안한 관계는 안전하게 유지할 수 있는 조건이 명확하다. 선을 넘지 않고, 배려하며, 책임을 과하게 지우지 않으면 지속된다. 그러나 그것을 이런 사랑이라 부를 수 있는가. 편안함은 관계에서 얼마든지 구현된다. 하지만 사랑은 본질적으로 그 선을 건드리는 감정이다. 위험을 필연적으로 포함한다.


사랑은 반드시 하나의 형태로만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사랑은 함께하지 않음으로 유지된다. 실제로 감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관계로 만들지 않는 선택 역시 존재한다. 감정이 이미 충분히 깊기 때문에 오히려 형태를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다. 그것은 일체성의 구현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아는 데서 비롯된 선택일지도 모른다. 형태를 만들지 않음으로써, 그 감정이 변질되지 않도록 두는 방식이다. 이러한 선택은 낭만이 아니다. 오히려 일반적인 언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그것을 구현하려는 순간, 관계는 쉽게 비극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구현을 선택하지 않는 것은 사랑이 어떻게 변하는지를 경험하고, 이해한 이후에 가능한 판단에 가깝다. 감정이 형태가 되는 순간 어떤 책임이 따라오는지, 그리고 그 책임이 감정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를 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 책임을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도 포함된다. 한 개인은 존재를 감당하기에 충분히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관계에서는 함께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더 현명한 선택이 되기도 한다. 감정을 유지하기 위해, 형태를 포기하는 선택. 이 경우 사랑은 관계로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상태로 남는다. 일상을 공유하지 않아도, 서로를 소유하지 않아도, 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더 깊이 남는다.


이런 방식의 사랑은 흔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한다. 그것은 겁이 없는 사람에게도 사건처럼 찾아오고, 처음에는 특별하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한 감정이 온다. 유난스럽지는 않지만, 잔잔하면서도 압도적인 감정. 하지만 동시에 한 인간으로서 감당하기에는 두려워진다. 잃고 싶지 않은 감정이 강하게 올라오지만, 지키기에는 너무도 큰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겁이 난다.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랑의 상태를 잃을까 봐 두려워지는 감정. 그저 그 사람을 통해 이 감정을 경험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스스로 의심하게 될 만큼. 그것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다른 많은 것을 포기할 수도 있게 되는 상태. 심지어 자신조차도. 그래서 위험하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경험하지 못한 사람이 경험한 사람에게 그것을 위험하니 포기하라고 말하기에는, 그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불가능해 보이는 사랑을 구현하려는 시도를 스스로 거절하고, 그것을 상태로 남기는 선택의 은유는 박찬욱 감독의 헤어질 결심(2022)에서 잘 드러난다. 이 영화에서 해준은 자신의 방식을 버리고 ‘붕괴’해 가면서까지 서래의 안전을 지킨다. 본인의 표현으로는 '여자에게 미쳐서', 수사를 망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삶이 완전히 무너진 것은 아니다. 사랑이란 결국 내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가는 데에 문제는 없다. 영화의 끝에서 서래는, 해준이 자신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녹음을 여러 번 들었다고 했다. 너무 좋아서 반복해서 들었다가, 결국 남편에게 들키고 만다. 그리고 그 남편 역시 그 음성을 듣고 나서,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질투, 그러니까 협박의 도구로 쓴 것이다. 해준은 자기의 말을 기억하지 못했다. 지금껏 서래에게 집착하는 것과는 별개로. 하지만 다시 듣는 순간 그것이 자신이 전했던 진심이었음을 다시금 인식하게 된다.


물론 이 영화는 경찰과 범죄자라는 극적인 구도를 가지고 있어 흐름상 비극으로 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 안에서 서로를 향한 사랑을 다루는 방식은 오히려 훨씬 성숙하다. 해준은 서래를 위해 부담스러운 행동을 하지 않는다. 대신 누구도 모르게, 오직 자신만 아는 상태에서, 스스로를 무너뜨리면서 그녀를 지킨다. 물론 해준을 아주 가까이서 보는 동료는 알아차리지만, 그 깊이는 본인만 아는 것이기에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이런 상태가 내가 동의하는 사랑의 흐름과 닮았다. 서래는 처음에 그 사랑의 깊이를 알지 못한다. 범죄를 저지르고 범인이 되지 않아야 했기에. 그러나 해준을 통해 사랑을 인식한 순간, 그녀 역시 해준을 향한 사랑을 시작한다. 물론 두 사람 사이에 처음부터 호감이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서로가 뚜렷하게 자각은 못했겠지만.


이 감정은 종종 첫사랑이면서 짝사랑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루어지지 않기에 오히려 안전해지는 역설. 그러나 서로를 향해 감정이 충분히 열려 있다면, 깊이는 순식간에 체감할 수 있다. 동시에 그것이 상식과 규범을 넘어설 만큼 강해지는데, 그럴 때 그 사랑의 구현이 비로소 위험해진다. 그래서 첫사랑이면서 짝사랑은 아프면서도 안전하다. 방향이 서로를 향하지 않기 때문이다.


서래는 이미 살인을 저지른 경험이 있는 인물이고, 언제나 죽음의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런 생존의 과정 속에서, 우연히 사건처럼 한 남자, 해준을 통해 사랑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그녀는 그 사랑을 구현하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매우 열려있다. '한국은 배우자가 있다고 해서 그 상대를 좋아하지 않나요?'라는 것만 봐도. 해준의 사랑을 인식한 이후, 서래의 선택은 언제나 해준을 향한다. 그녀는 해준의 사랑을 기억하는 음성 파일을 반복해서 듣지만, 본인의 일로 한번 붕괴된 해준의 세계가 다시 한번 무너질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현재의 남편이 그 파일을 해준의 부인에게 보낸다고 서래를 협박했기 때문이다.


서래는 구현을 더 철저히 거부한다. 그 사랑의 상태를 잃지 않기 위해. 그녀는 스스로 미결 사건이 되기로 결심하고, 동시에 해준이 다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모든 증거를 되돌려 놓는다. 조건만 보면, 서래가 윤리를 넘는 선택을 이기적으로라도 했다면 둘은 형태적으로 함께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다. 형태로 함께하는 것보다, 그 사랑의 상태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건 그 감정을 흐르게 한 당사자만 알 수 있는 마음이라 사실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렇다면 질문이 남는다. 서래가 사라진 이후, 해준은 그녀를 단지 기억에 남았던 한 명의 범죄자로 잊어낼 수 있었을까? 이 질문이 바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존재적 사랑의 본질이다. 이젠 없는데, 계속 있는 것. 서래는 사랑의 대상을 붙잡지 않는다. 현실에서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관계로 만들지 않는다. 다만, 멀리서라도 바라보고 싶다는 최소한의 욕망만 남겨둔다. 그러나 그마저도 결국 포기한다. 만약 그녀가 마음만 먹었다면, 상황을 이용해 둘이 함께하는 선택도 가능했을 것이다. 모든 것이 무너진 뒤, 오히려 함께할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그 길을 택하지 않는다. 그 사랑을 무리해서 현실로 가져올 수 있음에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는 것. 이것이 이 영화가 보여주는 성숙한 사랑의 방식이다.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아도, 그 주변의 사람들은 그 감정을 알아본다. 하지만 누구 하나 뚜렷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 것. 그리고 영화의 결론은 해준의 붕괴와 서래의 죽음. 결국 이 사랑은 위험이라는 은유로 마무리된다. 그렇다면 묻는다. 만약 그들이 경찰과 범죄자가 아니었다면, 상황이 조금만 달랐더라면, 그 사랑은 이루어졌을까. Dreams의 제니퍼와 페르난도의 경우는 어떤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 사랑은 애초에 구현될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이다. 그러나 상태로는 꽤 완벽에 가깝게 남을 수 있는 사랑이다. 이때의 선택은 포기가 아니라 의지이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그것이 변질되는 형태를 선택하지 않는 것. 이 선택의 기준은 현실조건이 아니라, 먼저 사랑의 순수성 자체에 있다. 순수가 아닌 사랑에 굳이 현실을 들이밀 필요는 없다는 말이다.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조건으로도, 그리고 먼저 인간으로서도 쉽지 않다는 것을.


결국 이 두 영화로부터 알 수 있는 '다른' 사랑, 존재를 건드리는 사랑은, 그것을 가지거나 구현하려는 순간 한계를 가지게 되고, 그 의도와 욕망을 내려놓을 때 오히려 남는다. 더 정확히 말하면, 사랑은 욕망으로 내려앉혀지게 되는 순간 시간적 한계를 가지고 눈앞에 온다. 어떤 사랑은 함께 있어도 사라지고, 어떤 사랑은 함께 있지 않아도 남는다. 사건과도 같은 이런 경험을 한다면, 사랑은 관계가 아니라 상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굳이 형태로 증명되지 않아도 존재할 수 있는 것. 분명히 있는데 말하지 못하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개념에 대한 앎과 확신으로 확장되어 다가온다.


이것이, 사건처럼 찾아오는 존재를 건드리는 사랑이다. 우리는 그것을 잊고 살아간다. 하지만 결국, 다시 기억해낸다. 이런 사랑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위험한 줄 알면서도 끊임없이 끌리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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