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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다 Apr 11. 2021

덕후가 되고 싶습니다.

‘기록의 쓸모’를 읽고

‘나는 왜 덕질하는 게 없을까?’
(중략)
내게도 꾸준히 즐기는 것들이 있었다! 스스로 덕후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건 남들과 비교하면서 괜히 느낀, 나에 대한 아쉬움이었나 보다.
(그래도 깊이에 대한 고민은 계속했으면 좋겠다.)

- ‘기록의 쓸모’ 중 -


 작가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적어놓은 줄 알았다. 안 그래도 요즘 딱 내가 고민하던 부분이 이것이었다. 누군가 뭘 좋아하냐고 물어보면 이것도 좋아하고, 저것도 좋아하고.. 라며 주절주절 읊다가 말끝을 흐리게 된다. ‘전 이걸 정말 좋아하고 누구보다 잘 알아요!’라고 말할 만한 것이 없다. 이 정도 애정은 너무 평범해서 상대적으로 하찮게 느껴진다고 해야 할까. 예를 들어 난 드라마와 영화 보는 걸 좋아한다. 그런데 한국의 넷플릭스 가입자 수가 약 400만 명에 육박하고, 출퇴근길 사람들의 90%가 스마트폰을 보고 있는 지금, 나의 콘텐츠 소비가 이 앞에서 명함이나 내밀 수 있을까 싶었다. 이제라도 ㅇㅇ덕후가 될 만한 걸 찾아봐야 하나?라는 생각까지 하고 있던 참에 위에 있는 저 글을 보게 되었다.



나는 왜 덕후가 되고 싶었을까?

 학창 시절이었다면 ‘덕후’라는 단어를 들으면 질색팔색 했을 것이다. 요즘의 덕후는 다소 부정적인 의미로 상대방을 조롱할 때 주로 사용하던 예전과 달리 긍정적인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되고 있다. 나도 그 긍정적인 의미를 담은 덕후가 되고 싶었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 이유는 2가지였던 것 같다.


 1. 취향이 뚜렷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빵덕후 #디즈니덕후와 같이 덕후라는 것은 내가 좋아하고 잘 아는 것을 나타낸다. 나라는 사람과 같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단어나 이미지가 될 수도 있다. 수많은 자기 계발서와 강의에서 ‘취향과 잘할 수 있는 것 찾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무엇을 하더라도 주어진 글자 수 안에서 나 자신을 표현해야 지원 자격이 주어지는 시대에 뚜렷한 취향이 없다는 건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인 무미건조한 사람이 된 듯한 느낌이었다.


2. 성공의 필수 조건 같았다.

 ‘덕후 성공시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한 우물만 판 사람들의 성공담을 여기저기서 접할 수 있다. 돼지고기를 너무 좋아해서 온라인 정육점 시장을 개척한 사람이나 화장품을 좋아해서 많이 써보다가 나중에 자신의 브랜드까지 만든 사람 등, 그저 좋아해서 했을 뿐인데 이렇게 되었다는 말을 한다. 이렇게 한 가지에 미치지 않으면 왠지 그 분야의 전문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정리를 하다 보니 나는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해 덕후가 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나를 진정으로 기쁘게 만들어주는 무언가가 없을 수도 있다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데 '저 이런 덕후예요!'라고 외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것 같다. 자신을 잘 드러내고, 무언가에 열정적인 사람들을 보며 부러웠고 그들처럼 나도 '멋진 덕후임을 증명' 해 보이고 싶었나 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의 덕후였다.

 '기록의 쓸모' 책을 읽으면서 바뀐 생각이다. 아, 깊진 않아도 꾸준히 즐기는 것이 있다면 그것의 덕후라고 할 수 있겠구나. 그 시간만큼 나의 애정과 에너지를 쏟은 것이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꾸준히 해온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정말 단순하거나 빈도가 잦지 않은 것들도 다 포함하니 생각보다 많은 일들을 꽤나 오랜 시간 해오고 있었다. 10년째 일기를 쓰고 있고, 7년 정도 매일 아침 사과를 먹는다. 한 달에 몇 번은 베이킹을 한다. 해외여행을 가면 꼭 그 지역의 스노우볼을 사 온다. 숨이 차는 것도, 땀 흘리는 것도 싫어서 평생 운동이란 건 해본 적 없었는데 필라테스는 나름 재미를 느끼며 다니고 있다. 평양냉면을 좋아해서 맛집들을 저장해놓고 도장 깨기를 하고 있다. 어찌 보면 그냥 습관이고 굉장히 사소한 것들이지만, 어떤 보상을 바라지 않는 순수한 마음에서 비롯된 행동들이라 의미가 있다.



나를 위한 덕질 업그레이드

 인용한 글에서 작가가 깊이에 대한 고민을 계속한다고 말했다면, 나는 작은 변화들을 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꾸준히 해온, 나를 기꺼이 움직이게 만들었던 것들을 더 다채롭게 즐겨보는 것이다. 매일 가는 장소도 다른 길로 걸으면 새롭게 느껴지고 몰랐던 걸 발견하기도 한다. 내가 좋아서 해온 일들을 그냥 습관처럼 반복하지 않고 더 재밌게 오래 할 수 있도록 사소한 차이를 만들어보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이 분야의 전문가가 되겠어!라는 욕심을 버리고, 나만의 방식으로 꾸준히 즐기면 한 우물은 못 파더라도 탄산수가 흐르는 도랑 정도는 팔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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