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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곰 Jul 15. 2024

아무튼 핀란드+3_바다가 들린다

그리하여 대망의 첫 여정, 고민 끝에 내가 내린 결론은 헬싱키 중심가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Ullanlinna 해변이었다. 왜 이곳이어야만 했는지를 딱 짚어 설명해내기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매 번 핀란드에 돌아올 때마다 나는 꼭 이곳으로 향한다. 널리 푸른 하늘, 잔잔하게 일렁이는 윤슬, 그리고 또 숨을 후, 하고 몰아쉬어도 좋을 것만 같은 한낮의 여유로움... 핀란드에서 내가 느낄 수 있는 모든 '잔잔한 행복'들을 축약해 놓은 곳을 꼭 하나만 꼽으라면 아무래도 이 곳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해변에 이르기까지의 여정은 순조로웠다. 마침 살짝 흐리던 날씨도 슬슬 풀려가고 있었고, 트램을 타고 이동하며 오랜만에 바라보는 헬싱키 항구의 모습도 아름다웠다. 그리고 걷고 스쳐가며 만나는 푸른 헬싱키의 여름. 5월까지는 바싹 말라있던 나무들이 며칠 새 피는 풍경이 늘 짧지만 아름답고 신기하다고 했던 보영이의 말 때문인지, 곳곳에 우뚝 솟아 푸른 잎을 내뿜는 그들이 새삼 존경스럽게 느껴졌다. 생명이란 이런 것이구나, 내내 깊은 어둠과 강인한 추위 속에 있더라도 그 '가능성'을 함뿍 머금은 채 자신의 때를 버텨내는 것. 그러한 생각들로 이리저리를 걷다 보니 어느새 우리는 해변가에 도착해 있었다. 




해변가에 내려가 한적한 시간을 보내기 전, 우리는 우선 Kaivopuisto 공원의 언덕 위 전망대로 향했다. 이 근처에 오면 늘 가장 먼저 저 아래로 잔잔한 바다의 숨결이 들리는 이 곳 언덕으로 향한다. 5분 정도만 걸어 올라가면 되는 야트막한 능선을 넘고 나면, "아" 하고 숨을 쉬듯 작은 탄성이 터져나오는 곳. 그렇게 우리는 다시 이 곳 언덕에 서서 저 멀리의 바다를 경탄하듯 응시한다. 전망대 위에서 널리 하늘 아래까지 지평선, 그리고 건너편 섬과 마을까지 내달리는 시선에서 느껴지는 한적한 자유로움. 시간은 잠시 우리에게 멈춤을 허락한다. 그렇게 한참을 우리는 이 곳에서 저 멀리를 바라보았다. 바다를 들으며, 시간을 느끼며. 


생각해보면 늘  이 곳에 올 때마다 혼자만의 사색을 즐기곤 했다. 조용한 경치를 구경하고 싶기도 했고, 친구들과 만나지 않는 시간을 어찌 활용할까 고민하다 보면 단번에 이 곳에 떠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보영이와 함께여서 너무 좋았다. 인스타그램에 자랑할 수많은 '인생샷'들을 건질 수도 있었고, 공원과 바다를 함께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도 좋았다. 보영이와 함께 있으면 늘 나는 꺄르르, 10대 소년처럼 변해버린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15살 언저리의 그 시절로 말이다. 그떄의 나는 수줍음이 많았으나 속에는 뜨거운 열정이 가득한, 아직 스스로를 다 완성하지 못한 소년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른여덟의 내가 여기 있다. 그때의 순수함을 마음 한구석에 두고, 어쩐지 조금은 적절한 온도로 식어버린 내가. 그리고 그 긴 세월을 함께한 친구가 주는 뜨거운 위안. 나는 어쩌면 늘 이 따뜻한 온기를 느끼려고 이 곳으로 돌아오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언덕을 넘어 바닷가로 향하는 길, 우리는 작은 항구로 이어진 길을 따라 걸으며 장난을 쳤다. 스스로 조금 망가지는 일도 두려워하지 않는 우리는, 그래서 그저 순수한 의미의 즐거움 속으로 유영할 수 있었다. 항구로 향하는 아름다운 길에도, 저 멀리에서 보이던 바다가 가깝게 새근대던 순간에도 우리는 현재였다.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의 나로 존재할 수 있는 시간. 이 곳 핀란드의 바다와 친구의 존재가 내게 주는 선물은 바로 그것이었다. 무엇도 아닌 지금의 행복. 순간이 찰나에 지나지 않더라도, 그 찰나들을 웃음으로 메우며 나아가는 일의 중요함. 그런 것들을 조금씩 배워나가면서 우리는 어른이 된다. 핀란드에서의 하루하루들은 그렇게 나를 어른으로 키워내주고 있었다. 



그렇게 조용히 서로를 걷던 우리는 바닷가 바로 앞에 위치한 전망 좋은 카페 Ursula에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카톡으로, 인스타로 서로의 삶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사진 한 장 안에 담기지 않았던 뒷이야기들을 주욱 듣고있다 보니 이제 흐릿했던 보영이의 삶이 조금 더 구체적인 모양으로 그려지는 듯 한 기분이었다. 그리고 조금 더 솔직한 나의 마음들도 흘러가듯 이 곳 바다앞에 툭툭, 던져둘 수 있었다. 이상하게도 보영이와 함께 있으면 나는 누구에게보다 솔직해진다. 핀란드가 주는 안온한 분위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으나, 보영이가 가진 커다란 장점 떄문이기도 하다. 사람의 마음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걸러내주는 능력. 그런 능력이 그녀에겐 있었다. 그랬기에 누구보다 편하게 나는 내 마음의 불순물들을 그녀 앞에 내놓는다. 조금 미안한 마음과 함꼐, 진심을 담아. 


그렇게 헬싱키에서의 첫 오후가 흘러갔다. 


바다가 들리는 카페에 앉아, 우리는 서로의 의미를 나누어 마셨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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