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변화, 중심을 지키는 것 (10)

나를 이루는 공간, 내 공간. 자기만의 방.

by RAMI

이사를 하고 가장 크게 달라진 점은 내 공간이 많이 커졌다는 것.

나를 이루는 공간. 나를 키우는 공간. 내가 꿈꾸는 공간.


이전 부모님과 본가에 살 때는 삼 남매 이슈로, 남동생의 방보다 큰 방을 언니와 같이 썼었다. 그러다 보니 스무 살 넘어서 까지 나만의 공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프랑스에서 잠시 지냈을 때, 내 방을 가졌을 때 좀 안정감을 가졌었던 것 같다.

내 공간이 없었던 것도, 대부분의 물건을 형제자매와 공유해야 했기에 누군가 내 것을 빌려 쓰거나 사용하는 것 자체에 거부감은 없지만 그럼에도 '물어봐주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 중 하나.

먹을 것도 내 것 다 먹어도 된다. 단지 먹기 전에 먹어도 되는지 물어봐 줬으면.


비슷한 맥락에서 성장하면서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성찰, 그리고 어찌 보면 공부가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그건 나에 대해 앎이 그냥 오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스무 살 중반-후반을 지나오며 나 자신에 대해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예측 불가능한 것에 대해 꽤 많이 예민하다는 것. 집에서 쉴 때 발생하는 소음까지도.

그러다 보니 부모님과 다른 형제 모두와 같이 사는 본가에 있을 때는 내가 방에서 문을 닫고 있더라도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거실, 주방 소음과 (심지어는 방문이 주방 바로 앞이었더랬다.) 혼자 쓰는 방이 아니니까 누군가 방에 들어올 수도 있다는 예측불가능성이 나에게는 꽤나 불안정성을 키우는 요소였던 것.


언니와 같이 살게 되면서 작지만 나만의 방이 생겼고

첫 방은 정말 작았지만 내 취향에 맞는 책상을 들이고, 침대를 들이고, 침구를 골랐다. 옷장은 들어가지 않아 붙박이장의 문짝을 떼어내고(떼지 않으면.... 문을 열 수가 없었다) 그 작은 방에서 심리적 안정감을 찾았다.

내가 고른 내 것들 속에 있는 온전한 내 시간이 주는 충족감.


이 경험을 계기로 나를 위한 소비를 시작했던 것 같다. 이전까지는 나의 만족감보다는 다른 요소를 더 많이 고려했던 것 같은데. 특히 가격. 이 경험으로부터 나를 위한 소비를 해보는 것도 중요하다는 걸 머리가 아닌 몸으로 깨닫게 되었고 실천을 하는 첫 발을 내딛게 된 순간이었다.


그다음 방은 살짝 더 커졌지만 여전히 다른 가구는 들일 수 가 없었다.

다만 대학원생에서 직장인으로 신분이 변화되었고 그러면서 책장을 언니방으로 보내고..... 책장을 들였다. 여가 시간에 주로 하는 것이 변화되니 주로 손이 가는 것도 바뀌었다.


정확히는 대학원생 때는 주로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고 책을 잘 안 샀고 여가 시간엔 자기에 바빴다.

직장인이 되니 그래도 나름 돈을 벌고 여가 시간이 생기니까 책을 하나 두 개씩 사모으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방도 작고 돈도 아껴야 했고 여러 이유로 제한되었던 것이 게임에서 아이템이 해금되듯이 조금씩 제한이 풀리니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

이전의 나의 만족을 위해 사던 경험이 책에도 발동되었다. 이전에는 책을 굳이 사야 할까. 내가 좋아하는 책이긴 하지만, 책은 그냥 빌려 읽고 반납하면 되고, 또 보고 싶으면 기다렸다가 빌리면 되지 않을까. 조금 기다리더라도...라는 생각을 했었다.

어떤 감정은, 어떤 경험은, 어떤 생각은 내가 꺼내보고 싶을 때에 꺼내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나에게 만족감을 주고 정서적으로 충족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나에게 중요하다는 걸 깨달은 이상, 미룰 수 없었다.

간혹 떠오르는 생각이 아니라 책장을 볼 때 그 책의 책 등만을 보면서도 '내가 좋아하는 책', '나를 위로해 준 책'이 되고 결국 이를 통해 나의 취향을 정립하고 나에 대해 더 알아갈 수 있다는 것.

뭐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이 이후로 책을 더... 사모으게 됐다. 나아가서 꼭 좋아하는 책이 아니라 시도해보고 싶은 책도 이제는 사보고, 독립출판물도 좀 더 많이 사보는.


그렇게 책이 점점 많아지다 보니 책장을 들이고 싶어 졌는데, 방이 책장과 책상을 수용하기엔 문제가 있었던 것. 언니방이 꽤나 커서 책상을 언니방으로 유배 보내고(언니도 책상은 종종 사용하기에) 책장을 들였다.

그런데 아뿔싸... 이직을 했는데 재택이 생겼다. 그래서 재택 하는 날은 출근하는 마음으로 언니방으로 출/퇴근.

그 생활을 일 년여 지속하다가 이사를 가게 되었다.


이사를 가게 된 시점에 책장에 책도 너무 많아졌고 독서량도 더 늘었고 들이고 싶은 독서 아이템도 많아졌다.

이사 가는 집이 이전 집보다 커지기도 하였으나 방들이 전체적으로 커서, 작은 방에도 언니의 큰 침대가 충분히 들어가고도 여유가 있어 고맙게도 언니가 큰 방을 사용하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주었다.

언니와 나의 성향차이도 있고 생활 습관 차이도 있어 서로의 편리와 효율성으로 내가 큰 방을 사용하는 것으로 정리되었고 기존의 모든 가구를 방에 들여놓아도 자리가 남게 되었다.


이전부터 고민하던 독서소파와 함께 책장을 두 개를 더 들이게 되었고 방의 무드와 나의 생활 습관에 맞추어 동선을 다듬었고 현재의 레이아웃이 완성되었다.

총 세 개가 된 책장에도 책장 별로 나만의 기준과 콘셉트를 정해서 나름의 큐레이션을 해두었고, 오브제와 함께 정리해 두었다.

그 결과 현재 지금 나는 하루의 2/3를 방에서만 보내는 사람이 되었다. 집이 아니라 방.

집에 언니가 와서 대화를 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는 시간과 집정리를 하는 시간 외에는 주로 독서소파나 책상에 앉아 있다.

이젠 카페에도 잘 나가지 않는다. 커피를 텀블러에 테이크아웃해 와 독서소파에 앉아 잔잔한 노래를 틀어놓고 책을 읽다가, 필요할 땐 책상에 가서 독서노트와 다이어리를 작성하고.


방의 크기가 커져서 일수도, 커지면서 내가 더 나이를 먹어서 일수도, 그만큼 성장해서 일수도 있지만.

내 공간이 생기고 나만의 방이 생기고, 그 공간에 내가 익숙해지고 안정감을 느끼는 만큼, 나도 안정적여지고 있다는 느낌.

그 공간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나 스스로에게 집중하고, (무엇이든) 깊이 탐구할 수 있고 쉬더라도 좀 더 편안하다.


그럼과동시에 이 모든 것이 정리되고 책장을 바라보다가 버지니아 울프 - <자기만의 방 / 3기니>에 무의식적으로 손이 갔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확인해 보니 이사 온 지 딱 한 달째 되던 날 책을 읽기 시작했다. 이전에 읽었을 때보다 더 와닿았고 더 잘 빠르게 읽혔다.

너무 운명론적인 생각일 수는 있지만, 때로는 책이 나를 향해 온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상하게 손이 가서 읽는데 어떤 의미로든 그 시기의 나에게 필요한 내용이라거나, 하다못해 차라리 그냥 아무 생각하지 말고 쉬라는 소설이라거나.


내 업을 생각했을 때에는 본가가 더 지리적으로 좋은 위치기에, 모두 왜 굳이 현재 지역에서 사는지 되묻는 사람들이 많았다. 대답할 요소들은 많았고 모두 납득하기도 했다.

여태껏 대답으로 내놓지는 않았으나, 한숨 돌리고 있는 요즘 제일 많이 드는 생각은 '자기만의 방'을 가지기 위해서라는 것.

물론 스몰톡주제의 대답으로는 너무 무거울 수도, 깊을 수도 있으니 난 또 가볍고 위트 있는 대답으로 넘기겠지만, 난 앞으로도 나를 이루는 공간, 나를 키우는 공간, 내가 꿈꾸는 공간, 그리고 내가 가꾼 공간.

이 공간, 자기만의 방에서 계속 성장하고, 고민하고, 성찰하고, 읽고, 쓸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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