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고교 선배와 밥을 먹었다. 선배가 물었다. “하람이, 과가 어디라고 했지?” 익숙하다. 대학에 들어와 많은 사람들이 전공을 물었고, 나는 그 때마다 ‘미디어 커뮤니케이션학부’ 이 긴 단어를 꺼내야 했다. 대답을 하면서도 망설임은 모두가 “응? 뭐라고?” 되물었고, 그 때마다 내 전공에 대해 부연 설명을 해야 함이 귀찮아서였다. 그때마다 “그냥, 신문 방송학과예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 상대에게서 감탄사가 나오면 그제서 목에 걸린 무언가가 싹 씻겨 내려간 기분이었다.
선배에게 대답했다. “나 미디어 커뮤니케이션 학부.” 선배는 아하!하고 대화를 끝내는 사람들과 달랐다. “커뮤니케이션? 커뮤니케이션을 배운다고? 뭘, 어떻게 배우는 건데?” “음…”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돈까스를 오물오물 씹으며 고민했다. “지금 너와 내가 커뮤니케이션을 하듯이, 커뮤니케이션은 모든 사람이 하고 그건 살면서 배우는 건데. 그런데, 그걸 뭘 더, 어떻게 배울 수가 있지?” 어떻게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냐는 질문은 전공을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으로 정하며 언젠가 듣게 되리라 생각했던 질문이었다. 서랍 한 구석 깊숙하게 밀어두었던 것을 선배가 꺼냈다. “그러게, 잘 모르겠어.” 당연하지, 모르겠는걸. 이것밖에 대답 못 하냐는 창피함, 고민을 했었어야 했다는 후회감과 동시에, 전공에 대해 정의를 못 내리고 졸업할 것만 같은 두려움으로 애꿎은 샐러드를 포크로 마구 찔러댔다.
그래, 어차피 짚고 넘어가야 하는 고민이었다.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사람의 사명’이라는 글을 읽고 물음표에서 느낌표로 바뀌는 것들이 많을 거라 기대했다. 교수라면, 나보다 훨씬 먼저부터 더 많이, 깊이 있게 고민했을 테니 답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큰 오산이었다. 고민에 대한 답을 쉽게 얻으려는 탓이다. 해결되지 않은 것들은 더 늘어났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이란 무엇인가?’ 질문에 대해 두 권의 책을 언급한다. <고르기아스>와 <말하기의 의미>. <고르기아스>로부터 언어와 폭력이 대립함을 말하고, <말하기의 의미>로부터 커뮤니케이션 또한 폭력이라고 말한다. 더 명확한 표현을 하자면 <고르기아스>에서는 그래도 폭력 대신 말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말하기의 의미>에서는 말만한 폭력이 있냐며, 커뮤니케이션은 상징 폭력이라고 한다. 전쟁을 먹고 자라,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설득적 도구로 여겨지기도 하는 커뮤니케이션. 여러 아이러니한 상황들과 얽혀 있는 커뮤니케이션. 저자는 결론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말의 힘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반성하고 성찰해야 한다고 말한다. 단지 ‘배움’에서 머무르지 않고, 커뮤니케이션의 본질에 대해 고민해야 하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을 배우는 사람의 사명이라고 말한다.
글을 읽으며 든 생각,
글을 쓰며 드는 생각들을 적어보려고 한다.
우선, 언어가 폭력이라는 부르디외의 말에 매우 공감한다. 언어는 폭력이 될 수 있다. 날카로운 말들로 상대방을 다치게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언어, 소통 자체가 공포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나는 대학교에서 경험을 많이 했다. 어느 순간 언어의 계급이 생긴다. 상대도 인식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인식한다. 그 계급의 형성을 인지한 순간부터, 투명한 벽이 생긴다. 벽이 플라스틱이어서 긁으면 흔적이 생기는지, 유리어서 깨부술 수 있는지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다. 투명색 벽에 언어와 소통이 마구 칠해져 있고, 벽은 나를 짓눌러 버린다. 졸지에는 공포가 되어 아무 말도, 아무 대화도 하고 싶지 않다.
두 번째로는 커뮤니케이션이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한 설득적 도구가 되어 버린 것에 대한 고민이다. 1학년-뭘 모르는나는 커뮤니케이션학이 실용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극단에 치우칠 때는 자본에 의해 만들어졌고, 자본에 의해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학문이라고 생각했다. 하루는 학문의 목적이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버는가?’인 것 같아, 정말 그만 두고 싶었다. 이건 내가 이번 학기에 들은 ‘스피치 커뮤니케이션’이라는 전공 선택 과목의 영향인 것 같다. 교수님은 계속 취업, 면접 얘기를 꺼내셨다. 교수님은 동기를 부여하시려고, 그런 말씀을 하신 것 같은데, 나에게는 너무 단편적인 동기 부여인 것 같아, 크게 와 닿지 않았다. 마치 취업을 위해 대학에 와, 면접을 위해 스피치를 배우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던 것 같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씀하셨으면 조금 더 좋았을 것 같은데-그저 얕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 한 학생의 의견일 뿐이다.
‘커뮤니케이션 학문의 목적이 자본의 쟁취이다.’ 이 생각이 얼마나 편파적이었는지 이제는 알지만, 그럼에도 많은 부분이 자본과 떼어놓을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모든 학문은 경제 활동 하는 것과 완전한 분리를 시킬 수는 없다. 그래서도 안 되고. 언제까지나 이상에만 머무를 수는 없다. 학문은 현실에서 사용되어야 하며, 그렇기에 커뮤니케이션 학문이 실용적이게 쓰이려면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설득적 도구로 쓰여야 하는 것 같기도 하다.그 효과가 무엇이냐는 거다. 커뮤니케이션 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원하는 효과는 무엇이며 내가 원하는 효과란 무엇인가.
... 내가 원하고 꿈꾸는 것은 무엇인가. 순수 학문인가? 순수 학문은 순수 학문대로 배울 때에 고민이 있을 것이다. 현실과 동 떨어져 이상만을 추구하는 듯한. 또는 이걸 현실에 끌어와야 함에 대한 부담감이던….
이런 저런 고민에도 결국 내가 전공으로 택한 건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다. 저자는 커뮤니케이션을 공부하는 사람의 사명으로 ‘고민하기’를 들었다. 누군가 나에게 전공에 대해 물었을 때, 나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 부단히 고민해야 한다. 훗날 기자, PD, 광고인 등과 같이 가시적으로 전공을 살린 직업을 갖지 못하더라도, 4년간 배운 것이 헛것이 되게 하고 싶지 않다.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지 않는 곳은 없다. 혼자서도 할 수 있는 것이 커뮤니케이션인걸.
커뮤니케이션학을 배우는 학도로서 나는 우선 삶에서 내가 지향하는 커뮤니케이션을 실천하겠다. 때로는 도구로 사용하나, 최대한 목적으로 삼고 싶다. 나, 우리만의 이익을 위한 커뮤니케이션보다는 너와 너희에게도 이익이 되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다. 말로 아름다움과 진리를 더럽히지 않고 최대한 그대로 전달하고 싶다. 자본의 분배를 더 불균형하게, 사랑의 분배를 더 불균형하게 만들지 않는 커뮤니케이션, 불균형을 조금이라도 고르게 하는 데 보탬이 되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다. 나의 진심을 담아, 너의 진심에 닿도록 노력하는 커뮤니케이션. 따듯함을 느끼고, 감동받는 커뮤니케이션을 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