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톺아보기

단언컨대, 이레 한 글자로 축약할 수 있다

by 배근필


1월


가장 터부시되는 종교와 정치. 언제부터, 왜 터부시하게 됐을까?

피로하기 때문이다. 일상과 고립되게 느껴지는 분야면서, 싸움과 분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만 맞다고 우기기 때문이다.


내 신앙 생활은 문화 생활, 또는 루틴전 종교 생활인가, 아니면 내 일상이자 삶인가.

‘무엇을 믿느냐’는 결국 무엇에 소망을 두고 살고 있냐는 질문으로도 이어진다.

그렇기에 나는 ‘종교는 정신 나약한 사람이나 믿는 것’이라는,

내가 중고등학생 때 주창해온 문장에 반박할 수가 없다.

맞다. 난 하나님 없는 삶이 공허하여 버겁다. 실존을 이해할 수도, 견딜 수도 없다.



2월


봄을 앞두고, 봄이 느껴진다.

동네에 있다 보면, 일어나서 하루를 보내다가 잠에 들고 다시 일어나기를 반복하다 보면 이 생활이 ‘강물’ 그 자체인 것만 같다. 흐르고 있지만 멈춰 있는. 멈춰 있지만 빠르게 흐르고 있는.



3월


(1)

글을 쓰고 싶다는, 또는 무언가를 올리고 싶다는 욕구가 매우 높아질 때가 있다.

그 때를 의심한다. 그 글은 대개 나를 드러나는 데만 그 동기와 기능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사적인 글쓰기에서 나를 드러낸려는 욕구를 완전히 배제하기란 어렵다.

완벽하게 나를 투명도 100%로 만들겠다는 것도 아니다.


글과 사진과 ‘업로드’하는 행위에 숨은 의도를 파악하기 위함이다.

나, 또는 최근의 나 / 나의 변화 등에 대해 진술할 대는 비교군이 있기 마련이다.

나의 경우, 그 진술은 항상 독자 혹은 청자를 염두에 둔 진술이었다.

그리고 hierarchy가 있는 진술이다.


그것으로부터 얻으려 하는 것이 무엇일까.

그 글을 써서, 그러한 차이점을 인식하고 기록함으로 얻으려 하는 것이 무엇일까.

(나만 묘하게 느끼는) 우월감, 그리고 JOMO(Joy of Missing Out)가 컸다.


그런 글은,

쓰는 내가 알고, 읽는 이가 안다.

쓰는 이와 읽는 이 사이 서열이 있는 글 말이다.


내가 글을 씀으로 드러내려 하는 건 무엇일까?

그것은 써 내려 갈, 또는 읽힐 가치가 있는 내용일까?

그렇지 않다면, 적어도 쓰는 나조차 설득되지 않은 글이라면, 보류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2)

<친절한 금자씨> 유명한 대사가 있다.

“너나 잘하세요.”

그건 성경을 관통하는 메시지기도 하다.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남이 이랬네 저랬네 할 게 아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묵상하고, 묵상을 나누는 나.

착각과 위선과 확신과 교만으로 점철된 내게 성경이 말한다.

“너나 잘하세요.”



(3)

취업 준비하는 과정에서 내가 얼마나 어려운지, 힘든지 알아주길, 헤아려주길 바라는 마음이 커질 때가 있다. 경쟁률이 어떻다, 취업난이다, 문과다, 채용 과정이 괴랄하다 등.. 특히 영어로 설명할 때면 말문이 막히고, 이걸 왜 구구절절 설명하고 있나 싶다.


그럴 때마다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난 왜 이렇게 알아주기만을 바라고, 이해받기만을 원하는 걸까. 그건 구직 과정이 길어지는 것에 대한 설명. 더 정확히는 나를 ‘능력 없는 사람’으로 볼까 걱정하는 마음. 두려움. 공포.


그게 오해일까? 그걸 내가 신경써야 할까? 정말 그렇게 생각할까? 능력 없는 사람이면 어떻고, 능력 없는 사람으로 여겨지면 또 어떻고. 오해 받으면 또 어떨까.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능력이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할 수 있는 만큼 최선을 다하면 된다. 오해받으면 오해 받는대로, 이해받지 못하면 그런 대로 걍 살면 된다.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그 누구도, 사실 나조차도 나를 온전히 알아주고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 외엔.



(4)

약 4년 전부터 고여 있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는다. 영적으로도 마찬가지다. 기승전나, 기승전나.. 생각, 가치관, 믿음, 신앙, 관계,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사고체계… 감정, 판단, 감상, 수용 비판… 취향, 호불호…


모든 게 ‘나’로 귀결된다. “그래서 나는 이래. 나는 이런 사람이야.” 얘기를 시작해도, 질문을 해도, 대답을 해도, 기승전 나나나. 그건 소통하려는 사람의 자세, 들으려는 사람의 자세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배우려는, 함께 하려는, 수평적인 관계를 맺으려는 사람의 자세도 아닌 것 같다.


결국 내가 누구인지 말하려고, 알리려고 묻고, 대화를 시작하고, 글을 쓰려고 하는 게 아닌지. 임계치가 느껴진다.



(5)

영화 <콘클라베>를 보고 왔다.

왜 ‘믿음’일까. ‘확신’이 아닐까.

믿음은 강제나 세뇌가 아닌 의지, 자유, 선택이다.

그렇기에 자기확신에 대한 경계와 의심이 전제일 수밖에 없다.


나의 현주소.

믿음을, 신앙을 취미 생활, 자기 계발, 문화생활, 생활, 자기 성장 등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

또는 종교로서의 믿음, 성경, 하나님, 교회를 도구화하는 것.

올인하지 않고, 철저하게 치밀하게 계산해서 손익을 계산한다. 그러나 그 기준이 나.

머리와 혀, 마음과 손이 모두 따로 논다. 각각의 거리가 무한대다.

지독한 자기 사랑. 스스로에 취해 사는.


내가 진짜 원하는 것. 내가 진짜 살고 싶은 삶. 그리고 그러한 청사진.

내가 정말 알아야 하는 것. 알 가치가 있는 것.

내가 기울어야 하는 것, 바라봐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 아니다.



(6)

“바빠?”라는 질문에, 답을 망설이게 된다.

바쁜가?

정말 바쁜가?

몸이 바쁜 것일 수도 있고, 마음의 여유가 없는 것일 수도 있고, 둘 다 일수도 있다.

쓸데없이 바쁘기만 한 건 아닌지, 나로 가득 차 분주한 건지, 삶의 우선순위가 잘 정리된 게 맞는지, 중요한 것과 급한 것을 잘 구분하고 있는지- 이것 저것 복잡하게 생각하다 보면 답변이 지연된다.


고등학생 때 칸트를 배우며 했던 다짐.

사람과 만남을 수단으로 삼지 않겠다던. 목적으로 여기겠다던.

잘 지키진 못했지만.


그래도 그때의 다짐은 지금도 유효하다.

누군가와 만나 (대면) 시간을 보낼 때는 그 사람을 목적으로 여길 것.

같이 음식을 섭취할 생물로서가 아니라.

함께하는 시간에 몰입하고 집중할 것.


바빠서, 자신으로 가득차 있어서,

함께하는 시간마저도 단절된,

그리하여 분명 같은 공간에서 같이 얘기하고 있으나 따로 있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시간을 내어주었던 목사님, 사모님들, 이모들. 선생님들과 언니오빠들. 친구들. 부모님. 가족들.

처럼 살고 싶었는데, 요즘 난 나로만 가득차 도무지 시간도, 곁도 내어주지 않는다.

그런 척 시늉만 하고 있다.



(7)

어쩌면

유별난 돌봄

유난인 돌봄

과잉된 돌봄


그 유별나고, 유난이며, 과잉된 돌봄이 나를 일으켰다.


돌봄을 함으로 돌봄 받는다.



(8)

참 좋아했던 영화 <위플래시>를 다시 보고 왔다.

자발적으로 다시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지금으로선.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다르게 보였다.

세상이 나를 대하는 방식.

그리고 거기에 내가 응하는 방식.

우리가 서로르 대하는 방식.



(9)

예수님을 바라본다는 것이 무엇일까.

내 시선은 왜 예수님이 아닌 ‘나’에 머무를까.

더 나은 내가 되려고 믿는가?

말씀을 읽을 때, 들을 때, 나눌 때, 내 초점은 예수님이 아닌 내게 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

따라 가라면 앞장서 가는 이를 바라 보아야 한다.



(10)

친구가 물었다.

교회라는 공동체에 속하는 게 불편하지 않냐고.


불편하다고 했다.

불편하고 귀찮고 성가시고 부담스럽다고 했다.

내 성향, 성격과 맞지 않다고도 했다.


하지만 내가 교회를 필요로 한다.

앤디 목사님 말씀처럼,

내가 교회에 있는 이유는, 교회가 나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 아니다.

내가 있는 게 사역에 도움이 될까? 글쎄.


내게 교회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교회를 주셨기 때문이다.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함께 있겠다고 하셨다.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멀리서 찾을 것도 없다. 바로 내 옆에 있는 사람이 내 원수다.

죄인들이 모여 서로의 발을 닦아주는 곳. 그리고 다른 이의 발을 닦아주는 곳.

그게 내가 경험한 교회다.



(11)

분명 뭘 하긴 했는데, 진짜 했는데, 뭐 하나 제대로 한 건 없는 느낌이다.

에이- 의미 없는 시간만은 아니었을 거야- 스스로 위로도 못할 만큼

집중도, 몰입도, 효율도, 성실도, 꾸준함도 없던 나날들.

그러려던 것도, 그러고 싶은 것도 아니었는데.


나를 믿지 못하겠어서 타인이 필요하다. 그 모든 글자와 계획과 기록 장치와 루틴을 다 설정해 놓아도 나사 하나 빠지면 붕괴되는 이 체계가 너무도 빈약하여, 타인이 필요하다.


능동적 피동석. 자율적인 강제. 그렇게나마 돌아가는 것들이 있다.



(12)

“너희는 귀을 기울이고 내게로 나아와 들으라. 그리하면 너희의 영혼이 살리라”

(이사야 55:3a)

생명



(13)

사랑을 알려준 이들.

부모님, 선생님, 커뮤니티 친구들, 선후배들, 가족, 교회.

사랑은 지저분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믿음도, 신뢰도, 의지도. 극렇지 않다면 그것은 아마도 표백. 또는 세뇌.


서로로 인해 설명되는 것.

서로에게 물드는 것.

사랑은 문이 열려 있는 울타리.

자유가 있는, 그러나 비자유도 있는.


우선순위의 변화.

몹시 자연스럽게.

몹시 기꺼이.



(14)

인생네컷이 ‘네 컷’인 이유는 기승전결-4형식에 대한 익숙함

그러나 인생은 네 컷이 아니다.



4월


이 이후부턴 달라질 거야 - 라는 거짓말에 속지 않겠노라 다짐하면서도, 그것이 주는 안락함이 편안해서 반복하게 된다. 이 여행 이후에 또 달라질 것을 다짐하고 있다.


“손님 여러분, 우리 비행기 곧 착륙합니다.”


나긋한 목소리를 들으며,


가본 적 없는, 그러나 알고리즘 안에 충분히 있어서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교토를 생각하며.


오월. 유월.

입에서 굴러굴러 부드러이 나가는 유음처럼,

오월도, 유월도, 그렇게 또 한 해가.


항상 담보로 살아가는 것 같다. 어떤 순간에 미안해 하며.


무언가가 나를 바꿔줄 거란 착각.

그런 기대를 갖고 들었던 강의.

강의를 들으면 달라질 거라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았다.

너무나 당연한데도.


이전에 친구가 좋은 친구가 무엇인 것 같냐고 물었다.

나는 바닥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답했고,

친구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이라고 답했다.



5월


(1)

1624

마태복음 6장 24절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


‘섬기면 안 된다’가 아니라 ‘못한다’ = 불가능

그런데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불가능한 걸 하려고 한다면 불행하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

한 주인만 섬길 수 있고, 그렇게 살아야 마음에 평안이 있다. 아니면 마음만 복잡해짐.


하나님께선 분명히 평안을 약속하셨는데,

왜 나는 그 평안을 누리고 있지 못하는가.


다리 찢기.



(2)

Is it worth paying my time?

왜 아니라고 생각이 들면서 놓지 못하는가.



(3)

내 젊음을 어디에 사용하고 있는가.

왜 그러한가.

영적 성장이 있는가.


불편하게 살아야 하는데, 요즘 너무 편안하다.


spiritual paralyzed?



6월


(1)

내 맘에 자꾸 부풀리는 허영심, 티내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난 무엇을 자랑스러워 하는가.

무엇을 자신감, 자존감의 원천으로 삼고 있는가.

그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정체성이 아니라면…



(2)

지속 가능한 정도가 최선일 수도 있다고 받아들여 보기로 했다.



(3)

남들을 부러워할 게 아니라, 그렇게 살아내면 된다.

인생의 목표는 여럿이 아닌, 단 하나.

어떻게 살지는 내가 선택하는 것.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4)

예측하게 되는 게 많아질수록, 판단하게 된다.

이미지와 글로 만드는 편견.



(5) 또 인스타그램을 지웠다. 계정도 삭제했다.


다른 삶을 계속 보게 된다.

판단하고 평가하고 예측하게 된다.

그 사람을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다.

그냥 편하게, 나의 알고리즘을 더 단단하게 구축하게 된다.



(6)

밥 먹는 게 죄책감이 들고 수치스럽다면 그게 삶이냐.



(7)

여우와 신포도.

신포도 일화는 공포를 소구한다.

신포도를 못 먹은 포도를 보는 전지자의 시각. 존재하긴 한 것인가.

신포도 일화로 인한 불안과 공포에 휘둘려 살고 싶지 않다.



(8)

어떻게 살 것인가.

내 인생의 청사진이 교회에 너무 많음에 감사하다.



(9)

수진 사모님의 민트 초콜렛.

예진이의 생일 편지를 읽고 울었다. 오열했다.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너무 많다는 생각.

잃고 있는 게 너무 많다.



7월

(0)

카카오뱅크에서 내 이름은 이레다.

아이디는 Yireh.22 다.

창세기 22장의 여호와 이레 : 준비하시는 하나님

그의 준비하심을 믿고 따르고 싶다는 작은 마음.



(1)

난 저기 속하고 싶지 않다.

난 저렇게 살고 싶지 않다.

난 저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지금 이렇게’에 대한 생각.


내가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많은 걸 요한다면.

한정된 자원(시간과 에너지와 감정과 돈과)을.


무엇을 선택하느냐가 포인트가 아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 그것이 1순위라면…


하늘이 아름다워 보인다. 비로소.

숨통이 트인다. 비로소.

맞지 않은 옷. 제동이 걸렸던.

브레이크.


환상이 깨지는 순간. 혹자는 그것을 뭐라고 부르던...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더 깊이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그러고 싶다면

그런 마음이 진정 있다면



(2)

시간 관리. 결국 버리는 것. 포기하는 것.

더 높은 우선순위에. 그걸 혼동하면 꼬이고 복잡해진다.


왜 나는 가장 가깝고 날 사랑하는 사람들,

내게 정말 필요한 사람들에게 상처를 줄까.


언제까지 미룰 것인가.

지금이 아니라면, 도대체 언제?


덜 바빠지는 날은 결코 오지 않는다.

잠깐 만나는 그 시간에조차 집중하지 못하고,

자기 할 것 하기에 벅차서 핑계 대며 미루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지도 못하고,

알 여유조차 없이 지금처럼 살아간다면,

이게 삶인가. 내가 원했던 모습과 방향인가.

그렇게까지 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epiphany

paralysis 이후의 disillusion



(3)

갈라진 마음이 날 힘들게 했다.

결국 나의 지옥을 만드는 건 나다.


사람의 인생이 만드는 무늬. 정확히는 이랑.

그 이랑을 따라 가는 선택이란 물줄기.


시작은 한 통의 편지.

한 개의 카톡.

한 개의 말씀일지도 모른다.


Y의 편지.

V 언니의 카톡.

마태복음 6장 24절 말씀.


아주 사소한 것이 그의 이랑을 무너뜨리기도 한다.

강한 물줄기가 되어.



(4)

사랑은 열린 문. <겨울왕국>의 노래 제목이 맞다.

닫을 수도, 열 수도, 잠글 수도 있다. 그 몫은 문 안에 있는 사람에게 있다.

사랑과 나를 도우려는 모든 손길을 거절했던 것도 나다.

사랑, 돌봄, 도움, 손길을 받는 것은 내가 해야 한다.

그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5)

Sarah 언니는 독일 뮌헨에 가고,

예선이는 D.C.에 가고,

관채는 보스턴에 가고,

수빈이도 뭔가 갈 것 같다.


다들 가는구나

나는 가고 싶나?

이 도시와 나라를 떠나고 싶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내가 떠나고 싶은 건 결국 나겠지.

지긋지긋한 나.

그러나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안다.

그리고 주님께서 내게 살아갈 소망을 주신다는 것.

내가 깨지고 부서지는 에노쉬일 때,

비로소 나는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 그제서야.


내 구원은 나도, 타인도 아닌, 오로지 하나님이어야 하고,

그럴 수밖에 없다.



(6)

부럽다. 여기에서 일하는 사람들.

카뱅은 어케 해야 들어올 수 있을까.

이런 곳에서 이런 복지. 분위기. 조직 문화. 시스템.

지독하게 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개인주의 문화도 너무 좋다.



(7)

목적대로 사는 삶



8월


(1)

회사에서 기가 죽는다. 메뚜기가 된 것 같다. 화려한 고소득자들. 그들의 겉모습과 하는 얘기로부터 ‘인생 뭐 있노’ 생각이 든다. 연봉과 워라밸 모두를 잡은 사람들. 부럽기도 부럽고, 출산율과 결혼율만 봐도 답이 나온다. 여유와 부티가 느껴진달까.


왜 그게 갖고 싶을까.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나 혼자 안전한 도시를 짓고 카인의 후손처럼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고자 하는 마음. 궁전을 지어서 나의 조각상과 수집품으로 가득 채우고. 아쉬운 소리들을 해대지만, 근속연수나 내부 출생율만 봐도 여기가 어떤 회사인지 알 수 있다.


좋은 회사다. 주가는 나락 갔지만. 첨에는 부럽기도 하고, 주눅도 들고, 그랬는데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다. 내게 주신 기회를 maximize하려고 노력 중이다.


기회를 많이 주시고 열려 계신 분들이어서 이것 저것 해볼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내가 되게 진취적이고 적극적이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아닌가? 주어진 걸 하는 게 좋고, 글과 있는 건 좋다. 그런데 아이디어 내는 건 잘 모르겠다. 생각보다 수동적일 수도..? 반면 레오는 참 적극적이다.


‘좋은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좋은 걸 먹고 사고 입고 보고 마시고 맡고 듣고

좋은 곳에 가고 좋은 것을 사고

애기에게 올인하고

몸에 투자하는 것

그리고 오감과 뇌에 투자하는 것

나와 내 가족에게 투자하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금융, 투자, 돈과 시간과 체력과 에너지, 라이프스타일과 성향을 가꾸는 것.

그런 삶에 둘러싸여 있으니 왜 이리 전도서 말씀만 생각날까.


내가 어떻게 보일까도 잠식돼 있다.

그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나는 어떤 사람으로 보일까.

욕망이나 욕구가 결여된 사람?

그럼 사람은 매력도, 흥미로움도 없는데, 나는 항상 그런 사람이길 원했는데.



(2)

부쌤이 어떤 마케터가 되고 싶고,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지 물었다.

확신을 갖게 된 계기가 있는지도 물었다.

그 어느 것도 없었다.

되고 싶은 마케터가 없고, 어떻게 성장하고 싶은지도 없다.

브랜드 마케터가 되고 싶었지만, 카뱅에서 하는 걸 보니 하고 싶지 않아졌고,

확신을 갖게 된 계기는 더더욱 없다. 하고 싶지도 않다.



(3)

다시, 사랑은 열린 문.

문이지만, 열려 있다.

틈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은 질식.

그리고 꾸준함.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움.


상처를 받지 않으려 한다면

그 어떤 것도 할 수 없다.



(4)

이 세상은 무엇인가.

성경은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라고 하는데,

정말 그런 것 같다.



(5)

이제 나는 어른이 됐다.

갑자기 무슨 말이냐.

고등어 껍질의 비린맛과 비린내마저도 좋아하는,

정말 뼈째 씹어먹을 수 있는,

생선구이의 A to Z를 즐기는 사람이 된 것이다.



(6)

회사에서 느끼는 박탈감에 대해 얘기했다.

엄마가 마음을 잘 지키라고 했다.

보이고 들리고 둘러싸여 있다보면 비교가 끝이 없고 자기 페이스를 잃기 쉽다고.

감각을 위한 투자.

끔찍히 아끼고 관리하고 가꾸는 몸.



9월


(1)

수진 사모님 send off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그들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데살로니가 전서 5:12-13)


labour of love

넘치도록 많이 받았다.

시간과 돈, 마음과 체력, 사랑…


하나님께 all in 하셨기에 내게도 all in 하셨다.



(2)

목적이 이끄는 삶.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운동하는 것도,

시간을 쓰는 것도, 만나는 것도,

기분 내키는 대로 살지 않기 위해,

아침에 덥고 습하고 불쾌하면 막 말씀 읽기 귀찮고 짜증나고 하기 싫고,

시원하고 기분 좋고 쾌적하면 막 말씀 읽고 싶고,


살 만 하면 하나님보다 다른 게 눈에 들어오고

힘들면 다시 말씀으로 가고

바람에 나는 겨와 같이 가벼운 삶.


피곤해서 말씀이 읽기 싫다면

피곤하지 않게 해야 한다.

교제 시간이 아깝게 느껴진다면

미리미리 할 일을 조정해야 한다.


우선순위에 따라 정돈된 삶.

그렇게 살 거다.

살고 싶다.

차곡차곡..뒤죽박죽이 아니라.



(3)

가끔은 이 미생의 상태가 좋다고 생각한다.

그저 이렇게, 미완의 상태.

될 듯 말 듯 - 장기 수험생처럼,

아무것도 도전 안 해서, 아무것도 아닌 가능성의 상태.

그게 편안하고 안락하여 이렇게 살고 있나.



(4)

필요에 맞게 돕고

필요에 맞게 사랑해야 한다.

그게 지혜이고..

예수님께서도, 리더들도 그러신 것 같은데. 나는 아직 먼 것 같다.



(5)

코드러너에서 느낀

도태된다는 감각.

뒤떨어진다는 감각.

실시간으로 느끼는 건 꽤나 낯설었다.

실제적이고 솑에 잡히는 걸 만들고 싶다는 생각.



(6)

미쉘과 맷이 돈을 많이 벌고 싶냐 물었다.

내가 돈을 소유하는 게 아니라 돈이 나를 소유한다는 느낌에 대해서 얘기하고 싶었으나, 조리있게 대답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7)

내가 누군지 다시금 보여주신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너무 적나라하게 보여주셔서, 화가 날 지경이다.


내가 가진 가치관과 기준이 얼마나 cheap한지.

가장 외모 지상주의적이고, 가장 감사하지 않고, 가장 세상적이고, 외모와 사는 곳 등으로 사람을 평가/판단하고, 주눅들었다가 으쓱대고, 우울했다가 좋아하고, 어떻게 하면 더 좋은 걸 먹고 마시고 입고 사고 가고…할까에만 매몰돼 하나님을 아는 것에도 말씀에도, 열매 맺는 삶에도, 사역과 자매와 교회에도 관심이 하나도 없다.


이러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blessed&abundant life를 누리지도, 평안도 없지.



(8)

지금의 감각을 유지하며 살고 싶다.

통근. 동료. 유연근무제. 보상.

저녁 약속. 운동. 체력. 피부. 대화, 관계, 교회.

가끔 궁금한 거 먹으러 가고,

시간에 얽매이거나 쫓기지 않는 삶.

자기를 돌보고, 이웃을 돌볼 수 있는 삶.

ㄴ근데 과연 그러한가?



10월


(1)

오빠들이 방 밖에 나왔다.


(2)

영원히 오지 않는 고도를 기다리며.

내가 원하는 건 뭘까.

내가 기다리는 건 뭘까.

정규직 취업? 대기업? 네임? 연봉?

직무? 안정성? 결혼? 연애? 다이어트?

서합? 최합? 공채?

그 이후...?


영원히 오지 않을 것들을 기다리는 느낌이다.

현재를 담보 삼고 살지 않겠노라 다짐했지만 현실은 유보와 담보다.

‘빚투’.



(3)

security와 significance

몸의 건강. 정신의 건강. 영혼의 건강.


내 삶을 어떻게 살지 결정하는 시기.

기차 선로대로, 달려왔다면,

그렇게 선로 놓이는 대로 살 수도 있지만,

하나님을 따르는 것만큼의 모험. excitement



(4)

yet not i but through Christ in me



(5)

기를 단련한 M.

왜 기가 빨리는가.

영향을 inject 당하냐, 마냐의 치열한 싸움.

새로운 정보값 수용을 위한. 긁히지 않기 위한.


(6)

생애주기가 있는 덴 이유가 있다.

안정감을 갖고 싶어.

그런데 if I have Jesus, I have everything

What do I need more??

결국엔 내가 예수님을 더 알지 못하고, 예수님이 얼마나 귀한 분이신지 알지 못하기에 일어나는 일..


사람들이 날 평가한다고 느껴서 갑갑한 걸까

아니면 내가 그렇게 평가하는 시선이 더 갑갑한 걸까



(7)

M과 끔찍했던 점심식사.

.

사실 한국 사회는 경쟁에서만 살아남은 맹수들만 살 수 있는 것 아닐까. 나날이 도태되고 밀려나는 것 같다 삶에서. 분명 내 삶인데 내 삶에서 밀려나는 것 같다.



(8)

친구가 꿈에서 “나 집 샀어”라고 말했다.

형언할 수 없는 박탈감과 허무함을 느꼈다.

이게 다 <땅땅뉴스> 때문이다.



11월


(1)

삶에서 밀려나는 감각.

느낌이 든다.


(2)

호반 최종 면접


(3)

LOTR


(4)

관악채플 영어ministry 1주년


(5)

카야 입사


(6)

내 무능력에 신물이 난다.

꾸준히 하지 못하는 것.

하기 싫으면 안 하는 것.

안정적인 걸 원하나, 모험적이고 싶어함?

메타인지가 안 되는 것 같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포기하고 싶다.


열심과 의지와 노력도 능력이라면,

능력이 부족해서다.


자본주의와 능력주의에서

매분매초 도태되는 느낌.

이탈하고 싶어.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뭐지?

그럼 난 뭘 해야 하지?

내가 해왔던 건데 나랑 안 맞는 것 같아.


내가 생각하는 나.

내가 지향하는 나.

정말 자연스러운 나.

뭐가 뭔지 모르겠어서

혼란스러워.


추구미와 도달가능미

그 간격이 너무 큰 것 같아.


자기연민은 갖지 말라고 했다.


(7)

현대 사회에서 통제 가능한 건 얼마나 적은가.

돈카츠 소스만이 내가 통제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다.


현대 사회에서 선택 가능한 건 얼마나 적은가.

명랑핫도그 소스만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었다.


(8)

월급이란

수치심과 맞바꾸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공간이 주는

일/업무가 주는

상사가 주는

경쟁과 톱니바퀴가 주는

노동자본으로 닿을 수 없다는 생각이 주는

비교와 열등감, 평가가 주는

공허함이 주는

생존에 대한 절박함이 주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수치심.

그것과 맞바꾸는 것 같다.


(9)

그가 주시는 상을 귀하게 여기는 것.


(10)

난 내게 뭐가 좋은지 모른다.

난 내게 뭐가 필요한지 모른다.

난 나를 사랑하는 방법조차 모른다.


(11)

서울대 계약직.


아빠가 내가 계속 회피하는 것 같다고,

도망치는 건 아닌지 생각해보라고 했다.

따기 어려운 것일수록 성취감도 크다고.

한창 상향가일 때 왜 아무나 지원해도 바로 들어갈 수 있는 그런 곳에 지원해서,

그런 곳에 가력고 하냐고.

첫 단추가 중요하다고.

첫 단추를 끼우기가 왜 이리 어려운 걸까.

아님 맞지 않는 단추를 맞지 않는 곳에 끼워넣으려고 해서 그런 걸까.

아등바등 살기도 싫고

경쟁하며 스트레스 시달리며 살기도 싫다고 했다.


아빠가 그곳에는 네가 원하는 그런 일이 있을 거라고 기대하는 건 착각이라고 했다.

그냥 일단 회사 나가서 어디든 취업했다고 말하고 싶은 거 아니냐고도 했다.

맞았다.

서울대 아닌 다른 곳이었으면 안 그랬을 거 아니냐고도 했다.

도망치는 것도, 빨리 어디든 들어가서 사라지고 싶은 것도 맞았다.


자존감

자격지심

열등감

괜찮아졌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해온 게 아닌 완전히 새로운 걸 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뭘 원하는 거니 넌.

새로운 인생.

그런 걸 원하는 것 같다.

스스로 해온 걸 천히 여기고

남의 떡을 크게 보며.



12월


(1)

마지막 성경공부.

떠날 때가 되어서야, 그 귀함을 알았다.

내가 대학에서 배운 가장 귀한 것.

하나님의 말씀.


(2)

아빠가

그건 오해라고 했다.

맞았다.


(3)

회식을 한 날엔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토를 한다.

술을 안 마셨는데도 게워내야만 한다.

내가 들은 얘기와 내가 한 얘기.

그리고 먹은 것들. 모두 비싸고 좋은 음식인데도.

결국 게워내야만 잠을 잘 수가 있다.

할 수만 있다면 귀도 씻고 싶고 입도 헹구고 싶다.


(4) 12/12부터-


Hilsong United Playlist

대구 신세계백화점

동대구역

에이블리


다시 이레.


드립커피

뼈해장국

찹흑미삼계탕

와사비라멘

햄스터

앤트러사이트

새로운 일기장

인왕산


(5)

Y 언니 결혼식

Y 결혼식

J 언니 결혼식


(6)

Joy of the Lord is my strength


(7)

CHRISTmas 임마누엘


(8)

이젠 정말 자라야 한다고…

이젠 정말 성숙해져야 한다고…

He pushes me


(9)

우린 완전히 찬 밥이 됐다는 친구들의 말

keyword
작가의 이전글[장손] K-가좆 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