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간의 세계여행 기록 ⎪몽상가도 때로는 지구 나들이를 합니다.
여행 323일 차, 2018년 3월 6일
세계 문화유산 도시인 쿠엔카에서의 5일 째다. 요새 계속 과거의 과오들이 떠올라 스스로를 괴롭힌다. 변하지 않을 과거의 일에 과몰입을 한 것 같다. 반성은 하되 스스로를 비난하지는 말자고 다짐하지만, 머리만 그걸 아는 것 같아 답답하다. 어색하게도 더 좋은 사람이 되자며 스스로를 격려하는 글을 메모장에 남긴 채 하루를 시작했다. 방에서 나와 조식을 먹으로 옥상에 있는 부엌으로 어슬렁어슬렁 올라갔다. 6달러짜리 호스텔에 조식까지 있다니 아침을 챙기기 귀찮은 여행자에게는 꽤나 괜찮은 조건의 숙소였다. 오늘은 평소보다 더 든든하게 버터와 잼을 빵에 발라 먹었다. 왜냐하면 여행 스타일을 한번 바꿔볼 겸 스페인어 수업을 처음 들으러 갈 예정이기 때문이다.
마침 최근에 매너리즘 때문인지 우울감에 조금 빠져있던 나로서 스페인어 수업을 들어보는 건 꽤나 괜찮은 환기가 될 것 같았다. 지금까지는 금전적인 문제 때문에 배워보는 것에 큰돈을 쓰지 못했는데 이번만큼은 2주 간 돈을 조금 들여 새로운 무언가를 배워보기로 했다. 빠르게 씻고 창 밖을 보았다. 화창하기를 바랐지만 비가 조금씩 내렸다. 우산을 챙겨 나와 어학원으로 향했다. 막상 바깥으로 나와 축축한 공기를 마시니 꽤나 상쾌했다. 쿠엔카 성당 시내에서 작은 개천을 따라 20분을 걸어 Spanish Institute라는 작은 학원에 도착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을 걸어 올라 사무실에 들어서니 두 여성분이 웃으며 나를 맞아주었다.
나를 가르쳐 줄 분은 중년의 여성 훌리아 선생님이었다. 훌리아 선생님은 나를 교실로 안내했다. 나무 책상과 의자 몇 개가 소박하게 놓여있었다. 소학원이라 다른 학생들도 있을 줄 알았는데 지금 사람이 없는 시즌이라 1:1 수업을 듣게 되었다. 훌리아 선생님과 우선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며 수업이 시작되었다. 처음 배운 것은 당연히 인사였다.
Hola. Buenos dias! Buenas tardes! Buenas noches!
4개월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수없이 들었던 인사들을 이곳 쿠엔카 작은 학원에서 다시 마주했다. 아는 건 고작 이것뿐인데도 첫 수업부터 아는 게 나오니 괜히 선행학습이라도 하고 온 것 같아 뿌듯했다.
여행 326일 차, 2018년 3월 9일
어젯밤부터 갑자기 열이 오르고 몸상태가 좋지 않다. 아무래도 감기에 걸린 것이 아닌가 싶어 약국에서 감기약을 먹고 겨우 잠에 들었다. 밤새 약발이 다 떨어졌는지 아침에는 다시 몸이 쑤셔서 제대로 일어나기도 힘들었다. 약을 먹으면 조금 괜찮아지나 싶다가도 다시 온몸이 떨린다. 스페인어 수업 세 번째 날인데 훌리아에게 가지 못할 것 같다고 메시지를 전했다. 루틴을 깨고 다양한 활동을 하기로 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루 종일 침대에만 누워 있으니 생각만 자꾸 무분별하게 흐른다. 여행에 나와서도 느끼는 답답함에 대해 나의 생각은 나 자신에게 자꾸만 극단적인 화살을 돌린다. 행복할 이유가 수두룩한데도, 요즘의 나는 행복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만들어 낸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누군가에게 내가 준 상처들을 떠올리는 것 같다. 그 사람이 실제로 상처를 받았는지 그렇지 않은지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나는 그저 자극적인 기억들로 행복해서는 안 되는 이유들을 만드는 중인 것 같다. 몸이라도 빨리 나았으면 좋겠다.
여행 327일 차, 2018년 3월 10일
어제 저녁부터 몸상태가 조금 괜찮아져, 라운지에서 스페인어 공부를 하며 무료한 시간을 때우고 있을 때였다. 그때 한 중년의 아저씨가 잠시 앉아도 되겠냐고 물었다. 그는 이란에서 온 뮤지션 아저씨 마지드였다. 흰색과 검은색이 섞어 회색빛이 도는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그는 간단하게 자신을 소개했다. 그는 스페인에서 이란 전통 악기와 연주하고 춤을 추는 뮤지션이라고 하면서 혹시 내일 시간이 되면 어느 곳이든 함께 다녀오겠냐고 물었다. 나는 나름 재미있는 경험이 될 것 같아 수락을 했고, 그렇게 오늘 그와 함께 쿠엔카 전경이 다 보이는 뚜리 전망대로 향했다.
뚜리로 향하는 택시에서 마지드는 이란 전통 춤인 수피에 대해서 설명했다. 수피의 철학은 세상 모든 것이 돌기에 나 또한 돌면서 세상과 하나가 될 수 있다 뭐 이런 내용이었다. 또 그렇기에 세상과 하나가 되면 아무리 돌아도 어지럽지 않을 수 있다고 했다. 차분하지만 자신 있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그의 모습에서 정말 예술가 같은 아우라가 풍겼지만 그 말만큼은 믿기 쉽지 않아 조금은 뜨뜻미지근하게 그의 말에 화답했다.
전망대에 내린 우리는 오랜만에 보는 넓은 경치에 감탄을 했다. 붉은색의 집들이 멀리 한눈에 펼쳐졌다. 우리는 함께 사진도 찍었다. 마침 날씨도 좋아 더욱 상쾌했다. 마지드는 날도 좋은데 뒷마을을 따라 산책을 하자고 했고 나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번에는 그가 내 얘기를 듣고 싶었는지 요즘은 어떤 생각을 하며 지내는지 물어봤다. 마침 최근 부정적인 감정들이 쉽게 차오르는 찰나에 그는 마치 나의 근심을 이미 알고 있다는 듯이 나에게 그런 질문을 던졌다. 그 생각의 괴로움에 갇혀 외로움을 느끼던 나는 자연스레 지금의 답답함과 스스로에 대한 공격적인 태도를 갖는 것을 그에게 전달했다.
그는 곰곰이 내 이야기를 듣다가 조용히 한마디를 던졌다.
"Help yourself."
그러고는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으니 그냥 그 자체를 받아들였으면 좋겠다고 했다. 받아들이고 반성하고 앞으로 더 나은 사람이 되면 된다고 했다. 일방적으로 너를 해치는 것은 누구에게도, 어느 쪽으로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사실 난생처음 들어보는 특별한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명제를 지금 나의 상황에서 누군가의 육성으로 듣다는 것을 글쎄 조금 다른 것 같았다. 맹목적인 자기 비난으로 어떤 것들이 내 마음속 자리에서 밀려났을까. Help myself. 나 자신을 도우며 찾아나가야겠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조금 쉬다가 해 질 녘 즈음에 마지드에게 수피 춤을 간단하게 배우기로 했다. 옥상에서 먼저 마지드의 설명을 들었다. 그는 중심을 잡고 생각을 비우면 전혀 어지럽지 않을 것이라고 하며 중심을 잡고 디딤발로 땅을 짚으며 돌았다. 그는 전혀 어지럽지 않은 듯 점잖이 멈추고 수피는 춤이자 명상이라고 했다. 나는 그의 노하우를 전수받고 수피 춤에 도전했다. 우선 생각을 비우고 그가 알려준 방식대로 내 나름 중심을 잡고 돌았다. 오, 되게 어지러웠다. 어지럽지 않을 것이라 믿고 회전을 한 후 느끼는 어지러움은 더욱 강렬했다. 마지드는 아마 내가 어지러울 것이라는 걱정과 두려움이 있기에 그런 것이라고 했다.
돌고 있는 세상에 맞춰 돈다라. 생각과 두려움을 받아들인다라. 정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어떻게 두려움을 없앨 수 있을까? 머리가 더 어지러워져 일단 웃으며 넘겼다. Help yourself 해야겠다.
p.s 다음 날 마지드는 떠났다. 떠나기 전 그는 마지막으로 이란 기타를 연주해주었다. 물론 수피 춤도 또 한 번 함께 춰봤는데 여전히 어지러웠다. 자기부정에 빠져있을 때 은인처럼 나타난 그가 떠나니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걸어야겠다. Help yourself를 기억하며 얼마 남지 않는 이 여행의 길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