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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미 Jun 18. 2021

치마 입고 돌아다니기

 인간은 모두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어떤 집단에 속하냐에 따라 때로는 아예 다른 세상에 살기도 한다. 그래서 누군가에게 당연한 것이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완전 새로운 것이 된다. 여행을 하는 이유도 결국 나와는 다르게 사는 집단을 접함으로써 새로운 자극을 얻기 위함에 있지 않을까? 일상에서 접할 수 있는 다른 집단에는 세대, 성별 등이 다양하지만 그중에서도 이성은 어딜 가지 않아도 만날 수 있는 가까운 집단이다. 그래서 오늘은 여성이 가진 것들 중 남성으로서 내가 해봐도 무방한 것을 한번 해보기로 했다.


 가장 간단하게 시도해볼 수 있는 것으로 '치마'가 떠올랐다. 사실 남성이 치마를 입지 못할 이유는 없다. 신체적으로 남성이 입기 어려운 모양새도 아니고, 중세시대 전에는 실제로 남성들도 치마를 입었다. (물론 꽉 끼는 미니스커트는 어려움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현대에 와서 치마는 보통 여성이 입는 옷이 되었다. 패션계가 아닌 이상 남성들은 보통 시도하지 않는 치마를 한번 그냥 겪어보고 싶었다. 깊은 궁금증이 있다기 보다 그저 느낌이 어떨지 문득 궁금했다.


 친구 두 명과 함께 동묘 시장에 갔다. 아무래도 치마를 사도 계속 입지는 않을 것 같아서, 구제 시장에서 사기로 했다. 시장 입구에서 식혜를 한 잔 시원하게 마시고 쇼핑을 시작했다. 남성 옷을 사러 이곳에 온 적은 종종 있지만 치마를 고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 괜히 머쓱했다. 그때 옆집 상점 아주머니가 우리에게 관심을 보였다. 은밀한 취향이 있는 사람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아서 먼저 당당하게 치마를 고르고 있다고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그리스 시대에도 남자들이 다 치마를 입었지 않냐며 잘 골라보라고 했다.


 아주머니는 꽤 열린 사람이었다. 그는 이어서 요즘에는 만드는 것이 패션이라며 우리의 수줍음을 시원하게 깨주었다. 역시 진정한 패션의 성지, 동묘시장인가. 어른들이 많은 곳이라 혹여 치마를 고르는 모습을 대놓고 안 좋게 볼까 괜한 걱정도 했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그것은 나의 편견이었다. 아주머니의 든든한 격려(?)로 우리는 본격적으로 각자의 스타일에 맞는 치마를 고르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정말 다양한 종류의 치마들이 있었다. 그중에서 12000원에 다양한 롱치마를 파는 샵을 발견했다. 가격도 좋고 종류도 많아서 딱 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색이 들어간 건 싫어서 검정 바탕에 흰 패턴으로 이뤄져 있는 치마 하나를 골랐다. 탈의실로가 거울 앞에 섰다. 치마라니. 웃겼다. 치마에 다리를 쭉 넣었다. 하의를 분명 입은 건데 허벅지 살이 서로 부딪히는 느낌이 굉장히 새로웠다. 지금까지 내게 하의를 입는다는 건 두 다리가 다른 공간에 따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치마를 입음으로써 그 공식은 깨졌다.


 계산을 마치고 드디어 치마를 입은 채 거리로 나섰다. 마치 중세시대 무사라도 된듯 남자 셋이 치마를 펄럭이며 곧장 짜장면을 먹으러 갔다. 괜히 벌거벗은 느낌에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했지만 아직까지는 딱히 사람들이 신경을 쓰는 것 같지는 않았다. 치마 끝이 조금 끌렸다. 조금 불편했지만 살짝 들어올리는 재치를 발휘해 앉아 짜장면 한 그릇을 뚝딱 비웠다. 친구들도 부딪히는 살결이 영 어색한지 느낌이 이상하다며 웃었다.


배도 채웠겠다 이화마을까지 치마를 입고 본격적으로 걸었다. 런웨이를 나서는 모델처럼 이번에는 고개를 딱 들고 길거리로 향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쳐다보기는 했지만 크게 놀란 기색은 없어보였다. 한 할아버지는 멋있다며 "베리굿!"을 외쳐주기도 했다. 행인들이 많은 동대문 거리를 지나 낙성 성곽길로 올랐다. 이왕 입은 겸 친구들과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었다. 중간에는 잠시 앉아 쉬기도 했는데, 서툴다보니 치마를 너무 걷어서 친구들에게 속옷을 보이기도 했다. 본의 아니게 속옷을 본 친구들은 못 볼 걸 본 듯 욕을 퍼부으며 당장 치마를 내리라고 했다.


 카페에 도착한 우리는 치마를 입어본 소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친구 한 명은 여름에 시원하게 입을 수 있어 꽤 만족스러웠다고 했다. (실제로 이 친구는 이후에도 가끔 치마를 입었다) 또 다른 한 명은 계단을 오를 때 들고 걸어야 하는 것은 조금 불편하다고 했다. 나도 우선 바람이 잘 통해서 좋았고 허벅지가 서로 부딪히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새로운 경험을 한 것 같아 즐거웠다. 고작 몇 시간 입은 걸로 치마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짧은 시간 동안은 나름 착용감도 좋고 크게 못입을 이유는 없어보였다.


 친구가 알아본 바로는 인류가 말을 본격적으로 타기 시작하면서 남자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고 하는데, 이제 다들 말 잘 안타니까 치마.. 입어도 상관없지 않을까? 치마를 통한 여행을 통해 내 일상적 생각에도 작은 금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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