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과 강바람에 자신을 내어놓기

2일 차 : 벨렝 해양 박물관, 현대미술관, 발견기념비

by RAMJI

첫째는 이번 방학 기간 3학년 2학기 수학 문제를 하루에 열 문제씩 풀기로 (자발적으로) 약속했는데, 엄마한테 낚였다며 툴툴대면서도 아침부터 약속을 지켰다. 고마워. 꾸준히만 하면 결국 끝낼 수 있다는 걸 알려주고 싶어.


오늘은 버스를 타고 벨렝으로 갔다. 햇빛이 눈부시고 날이 포근하다. 아이들이 겉옷과 목도리와 모자를 벗어 내게 맡긴다. 나는 그중 하나 둘을 흘렸다 주웠다 하며 걷는다. 둘째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사타구니가 아프다며 울더니 다리를 절뚝이며 걷는다. 우리 집에서 정형외과를 담당하는 남편이 어제 많이 걸어 그렇다며 단순한 근육통이라고 안심시킨다(참고로 나는 호흡기 질환 담당이다).


벨렝에서 꼭 가 볼 곳으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꼽히던데 대기줄이 퍽 길고, 아이들이 영 흥미를 보이지 않는다. 첫째가 그 대신 Maritime Museum에 가자고 한다. 남편이 흔쾌히 동의했다. 줄 설 필요도 없다. 우리는 비주류 여행 전문? 그래도 아이들이 원하는 곳에 가면 후회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첫째 둘째 둘 다 집중해서 관람을 한다. 세상에 이렇게 많이 컸다니… 특히 둘째 녀석은 스위스 여행에서 주야장천 아빠에게 업혀 다녔는데… 어쨌든 녀석들은 15세기 이후 탐험선이 싣고 다닌 대포, 서양의 검, 일본에서 가져왔다는 도, 전투 장면 그림 등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래서 인류는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 건가.


관람을 마치니 점심시간, 박물관에 딸린 식당에서 밥을 먹기로 했다. 뭐 그리 맛이 있겠느냐, 배를 채운다는 생각이었는데, 또 맛있다. 새로운 바칼라우 요리를 먹었는데, 나중에 찾아보니 튀긴 감자채와 함께 요리한 브라스(bras)였다. 매일 바칼라우를 먹고 싶다!


다음으로 길 건너 현대미술관에 갔다. 남편의 의외의 선택이었다. 여기서도 줄 서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나는 문외한임을 숨기고 퍽 진지하게 관람할 각오가 되어 있었으나, 우리 아이들은 뛰거나 소리를 내거나 해서 관계자의 따가운 눈초리를 맞아야 했다. 나체 작품 앞에서 큭큭거리며 나에게 다가와 귓속말로 “엄마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있어?” 물었고, 추상화 앞에서 또 큭큭 웃으며 “엄마 나도 저건 그릴 수 있어.”라는 예측 가능한, 우리 누구나 한 번쯤 생각했을 코멘트를 주었다. 관람이 끝나 밖으로 나와 맑은 파란 하늘을 보자마자 환호하며 “와~ 자유다!”를 외치는 아이들을 따라 걸으며 웃음이 났다.


지하도를 건너 발견기념비로 향했다. 첫째는 본격적으로 사진 촬영을 시작했다. 강 건너 멀리 예수상 같은 것이 보였는데, 브라질에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나중에 찾아보니 예수상이 맞다고 한다. 강가의 바람과 햇살에 취해 한참을 앉아있었다. 빨래를 햇빛과 바람에 널어 말리듯 사람도 한 번씩 그늘지고 메마른 실내에서 꺼내주어야 한다. 스스로 빛에 소독되고 바람에 찌꺼기를 날려 보내 말끔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발견기념비로 시선을 주니 뱃머리 너머 흰 달이 희끄무레 떠 있었다. 아이들은 생강과자를 꺼내 기러기에게 던져주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최근에 위가 아팠던 사람으로서 기러기 위장이 걱정되었다. 둘째가 말하길 그날 했던 일 중 가장 재미있었다니 할 말이 없다.



마지막으로 제로니무스 수도원을 찾았다. 리스보아 카드가 있어 무료입장인데 이대로 지나치기엔 아쉽다는 생각에 줄이 더 짧은 예배당 내부만 한 바퀴 돌고 나왔다. 이럴 거면 굳이 가지 않았어도 되었을 정도로 기억에 남은 것이 없다. 포르투갈에 가톨릭 성지가 참 많은데 여행 내내 우리 가족의 시야 바깥에 있었다… 고 한다.


트램을 타고 숙소에 돌아와 남자들은 라면을 끓여 먹고 나는 인스턴트죽에 바나나를 먹었다. 전날부터 남편이 틀어놓았던 흑백요리사 2를 나도 앉아 제대로 보게 됐다. 자신의 업이 곧 자신인 사람들을 보면서, 나도 아이들에게도 꿈이 있으면 좋겠다는 욕심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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