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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MJI Oct 24. 2024

고속도로를 건너는 사람들

리베카 솔닛은 <걷기의 인문학>에서 사람들이 더 이상 이동을 위해 걷지 않는 현실을 지적했다. 첫 번째 요인은 ‘교외화’이다. 대도시 바깥의 교외에는 주택가만 덩그러니 있어, 생활의 필요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먼 곳으로 이동해야 하고 이를 위해 자동차를 타야 한다. 도시는 보행자보다는 자동차를 위주로 설계된다. 보행자는 교외 주택가에 고립되고, 세상으로부터 격리된다. 미국이 특히 그런가 보다.


두 번째로, 걷는 것은 필수활동에서 여가활동이 되었다. 러닝머신 위를 달리기 위해, 덤벨을 들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헬스장에 가는 우리의 모습을 생각하면 된다. 과거에는 육체노동을 위해 움직이던 몸이었다. 똑같은 움직임이지만 이제는 한 자리에서 거울을 보며 같은 움직임을 반복한다. 저자는 이것이 육체로부터, 공간으로부터, 본성으로부터의 소외가 아닌지 묻는다.


책을 읽으면서 움찔했다. 걷는 것이라면 사실 나도 참 좋아하는데 여기 오고는 통 걷지를 않기 때문이다. 그러다 오늘 오전 테니스 수업을 마친 후 모처럼 집까지 걸어서 왔다. 거리는 1km 남짓, 15분이면 충분한데 그동안 늘 차를 타고 다녔다. 리베카 솔닛이 밝혀낸 것과는 다른 이유에서다.


서울로 치면 이태원 내지 한남동을 걷는 셈인데, 보도블록은 고사하고 인도라고 부를 곳이 따로 없다. 왼쪽으로는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지척에서 자동차가 매연을 흩뿌리며 지나간다. 오른쪽으로는 하수도가 열려있다. 진녹색의 이끼 위로 물이 흐르고 군데군데 쓰레기가 구겨져 있다. 냄새는 덤이다. 건너편에서 행인이 오면, 자동차가 오는지 살핀 후 하수구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 몸을 돌려 길을 내어준다.


인도, 가로등, 하수도, 신호체계는 선진국에서도 19세기가 되어서야 나타난 발명품이라고 한다. 당연한 것인 줄 알았던 보행을 위한 인프라는, 여유 있는 재정과 정부의 행정력이 뒷받침되어야만 누릴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한국은 맨발 걷기를 위한 길까지 지자체에서 다 조성해 준다고 하니 격차를 더욱 실감하게 된다.


사실 안전하지 않고 쾌적하지 않아서 걷지 않는다는 내 항변은 배부른 소리다. 왜냐하면 차창 밖으로 많은 시민들이 그 인도 없는 길을 걷는 모습을 매일 보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도와 차도의 분리는 큰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차로 30분 정도 걸리는 다른 도시에 한인마트가 있어, 고속도로를 이용해 가끔 다녀오곤 하는데, 어느 날 유심히 보니 한국에서 보는 고속도로와는 풍경이 사뭇 달랐다.

고속도로를 걷는 행인, 쉽게 찾아볼 수 있다.

4차선 도로인데 어디에도 차선이 없었다.

도로 곳곳이 움푹 파여있었다.

이따금 고속도로를 횡단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고속도로가 아닌데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동행인에게 물었지만, 고속도로가 맞다고 했다. 차들이 70km 속도는 내며 달리는 도로를 왜 사람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건너 다닐까? 나는 아직 그 이유를 모른다. 하나의 생활권, 그 한복판을 자동차길이 막고 있는 걸까? 찾아보니 가나의 도로 교통사고 사망률은 세계 최악은 아니지만 꽤 높다.   

가나 31.33 / 한국 5.76 (인구 10만 명 당 도로 교통사고 사망, 2020년)


그래도 그들은 걷는다. 인도가 없으니 갓길을 걷고, 둘러갈 수 없어 고속도로를 건넌다. 그들에게 걷는 것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필수적인 활동일 것이다. 그런 곳에서 10분이면 걸을 거리를 차를 타고 다니는 나는, 글을 쓰는 지금 잠시 마음이 편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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