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테오라와 델피
전날 아테네에서 비를 뚫고 메테오라로 달려와 에델바이스 호텔에서 하룻밤을 자고 일어났다. 별 세 개짜리 호텔이라 기대하지 않았는데 객실에 외풍이 없는 편이었고 난방도 잘 되었다. 침구도 깨끗했고 따뜻했다. 추가 비용을 내고 선택한 7유로짜리 호텔 조식도 만족스러웠다. 전날 저녁 식당에서 비트 샐러드를 시켜 먹었는데, 조식 뷔페 테이블에도 비트가 큼직하게 썰어져 놓여 있었다. 여기서 맛본 비트는 물기가 많고 달았다. 가나에서 한 번 비트를 샀는데 축축한 것이 곰팡이 기운이 느껴져서 푹 삶아버렸던 기억이 났다. 비트의 참맛을 그리스에서 알게 되었다.
애초에 그리스 여행을 혼자서 구상했을 때는 아테네 바깥으로 나갈 엄두를 못 냈다. 선택지가 너무 많아서였다. 세 가족이 함께 여행하게 되면서, 일행 중 한 그룹이 메테오라행을 계획한다고 했을 때 우리도 선뜻 함께 가겠다고 했다. 어떤 곳인지, 왜 사람들이 찾는지 여기 와서야 알았다. 마이산의 몇 배쯤 될 높이 솟은 시커먼 돌산이 여럿 자리 잡고 있는데 그 위에 수도원을 지어놓았다. 멀리에는 설산과 구름이 엉켜있었다. 상서로운 느낌에 사로잡혔다. 신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이곳에 수도원을 지었겠구나. 자재를 어떻게 옮겼으며 터를 어떻게 닦은 걸까.
이런 곳이니 고대 그리스 신전이나 최고의 사원이 있을 수밖에. 하느님의 인간의 모습으로 이곳에 오시어 맨발로 봄풀 위를 걸으시다 조용히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 같았다. (그리스인 조르바, 279쪽)
아이들을 동반한 우리는 계단이 없다는 수도원에 가려했으나 오전에 무슨 행사가 있어 출입이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다음으로 오르기 쉽다는 수도원 한 곳을 찾았다. 계단이 백 개가 넘는다고 했는데, 네 살짜리 막내도 씩씩하게 잘 걸어 올랐다. 아담하고 조용한 수도원이었다. 내부를 구경하고 마당으로 나가 끝에 서니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바람이 몹시 부는 탁 트인 전망을 바라보며, 신만을 생각하고 기도를 하며 삶을 바쳤을 수도사들을 상상했다. <그리스인 조르바>에 등장하는 타락한 수도사들도 떠올랐다. 이렇게 상서로운 곳에서 신을 만나지 못한 이들도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상서로움이란 무엇인가. 신이 준 것인가. 인간이 발명해 낸 것인가.
아홉 명이 함께한 여행이라, 첫째는 내 품을 벗어나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다. 수도원 바깥 마당에서 만난 첫째가 "오 기침이 안 나네"라고 혼잣말하는 것을 들었다. 나중에 일행에게 전해 들으니, 마당으로 나오기 전 수도원 내부에 초를 밝히도록 마련된 장소에서 첫째가 초를 올리고는 "기침이 멈추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를 했었다는 거다. 8살의 귀여운 기복신앙에 웃음이 났다.
전날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가지 못했던 델피를 부족한 시간을 쪼개 들리기로 했다. 델피로 향하는 길 위에서 다시 상서로움을 느꼈다. 구름을 뚫고 햇빛 몇 줄기가 조명처럼 땅을 비추었다. 멀리에는 알프스에서 보던 설산이, 가까이에는 올리브 나무를 품은 구릉이 있었다. 햇빛을 반사해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며 구릉을 끼고 난 길을 달렸다. 그동안 내가 설산과 초록산과 바다를 한눈에 담은 적이 있었던가. 과히 수많은 고대 신을 창조해 낼 영감을 주는 자연이었다. 때마침 메마른 돌산을 배경으로 무지개가 나타나 더욱 특별한 시간이었다.
3시 30분에 문을 닫는데 3시에 턱걸이로 입장해서 유적을 살펴보았다. 예상보다 규모가 컸다. 아폴론 신전은 남아 있는 몇 개의 기둥만으로도 관광객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기둥 뒤로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내렸다. 시간이 빠듯해 찬찬히 둘러보지 못해 아쉬웠다. 실제로 존재하는 델포이 유적지와 아이들의 만화책에 등장하는 신화 속 이야기가 뒤범벅되어 어디까지가 허구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이어서 며칠 전 아네테 행 비행기 안에서 읽은 어느 글도 떠올랐다.
델포이 신탁소에서 여사제 피티아는 한 달에 한 번 신탁을 전했다고 하고, 그녀가 앉은 자리에서는 미스터리한 증기가 피어올랐다고 한다. 2000년대 초반 어느 학자들은 그녀가 앉아있던 자리 아래에 있었던 틈에서 (단층에서 올라온) 메탄, 에탄, 에틸렌 같은 가스가 피어올랐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에틸렌은 마취제로 사용되었던 만큼 신탁을 전할 때 환각을 일으켰을 수 있다는 것이다. <거꾸로 읽는 그리스 로마사>의 저자는 기껏 가설을 소개해주고는 실제로 그랬을 가능성은 낮다고 결론 내려 읽던 재미가 반감됐다.
남편이 이날 장거리 운전에 렌터카 반납까지 고생을 많이 했다. 아테네로 돌아와 일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새로운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서둘러 세탁기를 돌리고 보니 첫째가 잠이 들어 있다. 느낌이 좋지 않다. 몸이 뜨끈하다. 8년간의 가족 여행 최초로 체온계를 챙겨 오지 않았는데… 오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