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테네
콧물도 없고 가래 끓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데 아이는 밤새 기침을 했다. 아침이 되어 일행에게 체온계를 빌려 열을 재니 38.6도였다. 감기가 나았다 싶었는데 일주일 만에 이렇게 되었다. 여러 이유가 머릿속을 지나갔다. 카이로의 매연, 전날 메테오라에서 만난 찬바람, 난방으로 내내 건조했던 숙소의 공기… 목이 부어 염증이 생긴 것이 아닐까 싶었다. 병원 진료를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을 시작했다.
doctoranytime.gr : 병원 예약을 할 수 있는 앱이다. 기억이 정확하지 않지만 가격은 80유로 정도였던 것 같다. 하지만 여러 차례 시도해도 휴대전화 번호 인증이 되지 않아 예약에 실패했다.
mobidoctor.eu : 모비닥터. 화상 연결로 의사를 만나 처방전을 받을 수 있는 앱이다. 비용은 37유로였다. 그러나 예약을 마친 후 앱에서 안내한 대로 사전 비디오와 오디오 테스트를 해보니 내 아이폰과 아이패드 모두 먹통이었다. 진료취소 메뉴는 보이지 않고... 37유로를 허공에 버렸나.
air-dr.com : 에어닥터. 내가 허둥지둥하고 있으니 일행이 알려준, 의사가 찾아오는 방문 진료 서비스 앱이다. 문제는 비용… 210유로. 여행자 보험을 믿고 진료를 신청했다.
에어닥터 예약은 바로 확정되지 않았다. 의사가 내가 있는 곳까지 찾아오겠다고 손을 들어야 성사가 되는 것이겠지. 그 사이 모비닥터 앱 상담창을 발견해 비디오, 오디오가 켜지지 않는다고 문의를 남겼더니 safari로 접속하라는 답을 들었다. 그걸로 기술적인 문제는 말끔히 해결되었다. 곧바로 에어닥터를 취소하려 했더니 그 잠깐 사이에 의사의 방문이 확정되어 버렸다. 취소해도 비용을 내야 한다는 안내 글에 마음을 편히 먹기로 했다. 그래, 뭐. 두 번 진료받자.
모비닥터가 먼저였다. 8시 30분 예약이었는데 1~2분 기다리니 의사가 접속했다. 짧은 인사 후 나는 증상을 설명했다. 의사는 즉시 항생제와 해열제 처방을 해주었다. 총 3분을 넘기지 않은 것 같다.
다음은 에어닥터다. 10시 30분 예약이었지만 의사는 11시가 넘어서 왔다. (교통상황 때문에 늦는다고 사전에 메시지가 왔다.) 나는 서둘러 진료를 보고 약도 먹여 11시로 예약해 둔 아크로폴리스로 달려가고 싶었건만… 의사는 느긋했다. 아이와 눈을 맞추고 이름을 묻고 인사를 했다. 이어서 청진기를 대보더니 폐에 감염(lung infection)이 있다고 했다. 입을 열게 하고 들여다본 후 목은 괜찮다고 했다. 목이 부었을 거라는 내 추측은 틀렸다. 그래서 콧물도 가래도 없이 기침만 했던 건가.
이제 항생제를 처방해 주려나 생각했는데, 의사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바이러스성인지 세균성인지 아직 모르니까, 항생제를 먹일 때는 아닌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해열제와 함께 기관지 확장제(Aerolin, 살부타몰)와 치료제(Flixotide)를 흡입기(inhaler)로 처방해 주겠다고 했다.
바이러스성일 경우 항생제를 쓰지 않는다는 건 수년간 소아과 문턱을 밟은 경험으로 알고는 있지만, 여행 중에도 정석대로 가야 하는지 고민이 들었다. 그러다 애가 더 아프면 어쩌나. 게다가 흡입기는 한국에서도 영국에서도 가나에서도 받아본 적 없는 처방이었다. 의사는 뜨뜻미지근한 내 반응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먼저 아이에게 기침 시럽을 먹였는지 물었다. 카이로를 떠나던 날 약국에서 기침 시럽 두 병을 사서 매일 아침저녁으로 먹이고 있었다. 의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끈끈한 시럽이 가래 배출을 막아 증상이 더 악화된 것이라고 했다. 기침 시럽은 엄마의 편안해지고 싶은 마음과 제약회사의 상술이 만들어낸 결과물이라고 했다. 갈색병에 든 그 시럽이 끈적거리긴 했다.
다음으로 열이 나는 건 몸에서 균을 태워 죽이려는 것뿐이니 고열이라도 걱정하지 말고 열의 추세를 관찰하라고 했다. 본인의 아이들에게는 39도를 넘을 때까지 해열제를 주지 않지만, 나는 여행객이니 38.5도를 넘으면 주라고 했다. 해열제를 먹이고 20분이 지난 후 따뜻한 물에 샤워를 하면 몸의 전투력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도 했다. 아스피린 밖에 없던 시절엔 하루면 끝나던 열이 (약물 오남용 때문에) 이제 며칠을 간다며 한탄을 했다. 이야기하는 중간 본인이 가져온 기관지 확장제를 아이에게 10여분 간격으로 세 번 정도 쐬게 하고는 처방전을 남기고 떠났다.
내게 남은 것은 두 종류의 처방전이었다.
모비닥터에서 받은 해열제+항생제
에어닥터에서 받은 해열제+기관지 확장제&치료제(흡입기)
결정은 엄마의 몫으로 남았다. 항생제를 먹이지 않았다가 여행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타지에서 애만 고생시키는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지만, 두 번째 처방전을 선택했다.
아이는 아픈 상태로 밖에 나가 야채수프를 좀 먹고 마스크를 쓴 채 또다시 내셔널 가든 놀이터를 찾아가 오후 내내 놀았다. 숙소에 돌아온 저녁 5시, 체온이 38.7이 나와 해열제를 한 번 더 먹였다. 이후 감사하게도 더 이상 열이 나지 않았다. 흡입기를 처방대로 쓰니 이틀이 지난 후부터 기침이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아이가 몰라보게 자라 바이러스와 싸워 잘 이겨낸 것이 기특하다. 비싸다는 이유로 왕진 서비스를 취소하고 싶었던 내 마음을 돌아본다. 대면 진료받길 잘했다. 느긋하자. 더불어 내 마음 편하자고 끈적한 기침 시럽을 더는 사다 먹이지 않기로 마음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