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1. 한 해 마지막을 바닷가에서

크레타

by RAMJI

카이로 땅을 밟았기에 피라미드를 보러 갔듯이, 크레타에 왔으니 크노소스 궁전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유적지는 안중에 없이 자기들만의 가상세계에서 뛰어놀았다. 아는 것이라곤 미노타우르스에 관한 신화가 전부인 나에게도 궁은 조금 심심했다. 미궁을 소재로 체험공간을 만들어놓으면 아이를 동반한 관광객들이 흥미를 갖고 참여할 텐데. 크레타 관광 당국에 건의하는 바이다.


그래서 크노소스 관람은 예상보다 일찍 끝났다. 근처에 있는 베네치안 수로를 찾아갔다. 가서 보니 굳이 일부러 찾아갈 필요는 없는 곳이었지만, 테마파크에 있는 듯한 재미를 느꼈다. 두 명이 나란히 건널 수는 없는 극히 좁은 다리 위로 강풍이 불었고, 성인들도 모두 겁을 먹고 몸을 숙였다. 스릴 만점.


점심은 헤라클리온 시내의 이탈리안 식당에서 먹었다. 후식으로 생각하고 초콜릿 피자를 시켰는데 늠름한 정식 피자가 나왔다. 너무 맛있어서 깜짝 놀랐다. 좋아라 했던 그리스 음식을 모두 제치고 이번 여행 최고의 요리 등극.


숙소로 가는 길에 적당히 차를 세워 어느 해변에 들어섰다. 한국만큼의 추위는 아니지만 쌀쌀한 바람이 부는 이곳에서 아이들은 맨발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이제야 너희에게 바다를 선물하다니 어른들이 나빴다. 추위를 느낀 나는 얼른 점퍼 모자를 뒤집어썼다. 여기를 여름에 왔으면, 아니 봄에라도 왔으면 아이들이 하루종일 놀았을 텐데, 하고 엄마 둘은 아쉬움을 표했다.


본 적 없는 바다였다. 4단 파도를 장착한 바닷물이 끊임없이 나를 향해 밀려왔다. 그때마다 하얀 술로 장식한 카펫이 여러 겹 떠 오는 것 같았다. 만들어낼 수 있는 모든 블루를 다 담고 있었다. 계속 쳐다보다가는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바다 너머로는 회백색의 초현실적인 디아 섬이 가만히 떠 있었다. 해변이 북쪽을 향하고 있어 해는 왼쪽에서 늬엇늬엇 넘어가려 했다. 그 방향으로 고운 모래 위를 천천히 혼자 걸었다. 발을 뗄 때마다 작은 모래 먼지가 일어났다. 둥글게 다듬어진 조약돌을 하나 집었다. 2024년을 이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마무리하는구나. 벅차고 감사하다. 새해 무슨 일이 있어도 행복하겠다고 다짐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슈퍼에 들려 장을 꽤 봤다. 나는 소고기미역국에 냄비밥을 했고, 남편은 제육볶음과 양상추 겉절이를 만들어냈다. 남편의 요리에 엄지 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따뜻한 한국음식으로 위장을 채우니 행복했다. 샴페인을 몇 모금 마셨더니 왼쪽 귀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몸이 거부하는구나. 여행 와서 몸을 잘 못 보살폈다. 새해에는 더 잘 챙길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