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른한 시작

크레타

by RAMJI

12월 31일, 한 해를 돌아보다가 감정이 풍부해진다. 만났던 사람, 있었던 일, 했던 생각 중 몇몇을 끄집어내 의미를 부여하고 감상에 젖은 채 잠이 든다. 1월 1일 아침 눈을 뜬다.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깬 것처럼 허무하다. 간밤에는 왜 그리 가슴이 부풀었던가. 다가올 연말에는 내 인생의 또 다른 서사를 만들어내 의미를 부여해야 할 거다. 떠밀리듯 2025년이라는 임의의 출발점에 섰다. 여행에서 이미 느긋한 시간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목적 없이 누워 좀 더 뒹굴거리고 싶다. 안되지. 얼른 일어나 감정을 털어내고 몸을 움직였다.


문 앞에 빨간색 큰 비닐봉지가 있었다. 이곳은 산타가 12월 31일 밤에 온다고 한다! 들떠서 아이들을 불렀다. 그러나 아이들은 놀라지도 기뻐하지도 않았다. 올 겨울 산타의 선물을 두 번째 받고도.


오늘도 바다에 가기로 했다. 하니아 공항에 내려 인근에 숙소를 구했더라면 분홍색 모래 해변으로 유명한 엘라포니시에 갔을 텐데, 섬 동쪽에서 가기에는 운전이 부담스럽다. 대신 섬 남쪽으로 중앙을 가로질러 내려가 Matala beach에 가기로 했다.


차로 크레타의 심장부를 지났다. 겨울에도 낮 15도, 온화한 이곳에도 설산이 있었다. 그 아래 돌산이 황량함을 드러냈다 (나중에 크레타 자연사박물관에 가서 보니 크레타는 반 사막(semi-desert)이라 한다). 그렇지만 내 눈앞에 펼쳐진 들판은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이다. 그 정체는 올리브 나무 아니면 오렌지 나무이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다시 생각났다. 소설 속 크레타의 여인들은 오렌지 꽃물로 몸을 단장했지.


도착했다. 1월 1일은 공휴일이다. 해변의 모든 가게가, 심지어 공중 화장실도 문을 닫았다. 내일이라고 열 것 같지 않다. 하지만 관광객이 전혀 없지는 않았다. 몇몇이 해변가에 앉아있거나, 수영을 하고 있었다. 우리 아이들도 옷을 적시며 한바탕 놀았다. 오늘은 바람이 없었고 청색의 바닷물은 얌전히 일렁였다. 단정한 고양이 한 마리가 먹을 것을 찾아 우리 주변을 어슬렁거렸다. 나도 해변을 어슬렁거렸다. 돌아보니 새해 첫날, 바라는 대로 목적 없이 느릿느릿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