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에 몇 초간 정전이 있었다. 저녁이 되면서 네다섯 번 정도 전기가 꺼졌다 켜졌다를 반복했다. 반복할수록 암흑상태가 길어지더니 밤 8시~9시 사이에는 수십 분 동안 정전이었다. 그사이 전원이 돌아왔음을 알려주는 경쾌한 띠리링~ 소리가 여러 번 났다. 냉장고에서 나는 소리임을 깨닫는다. 냉장고야, 앞으로 일 년 반 부디 잘 버텨 줘.
그러고 보니 한동안 정전 없이 잘 살았다. 이게 몇 달 만이지. 앞집 이웃에 따르면 전 정부가 정권 교체를 앞두고 전기를 펑펑 썼기 때문에 앞으로 정전이 잦을 것이라는 소문이 있다는데 정말 그런 건가. 가나 정부가 민간 공급자들에게 지불하지 못한 전기대금을 마련할 길이 없어 미국 정부에 부탁했다 들었는데 결국 미국이 외면했나(트럼프가 WHO 탈퇴 결정에 이어 이 문제까지?!). 머릿속 쓸데없는 생각들을 흘려보내며 창밖을 보니 길 건너 다른 집들은 불을 밝히고 있네. 아파트 내부 문제인가 보다.
큰 아이가 집을 뒤져 헤드랜턴을 찾아냈다. 나는 이걸 쓰고 설거지를 했다. 어둠 속 설거지통만이 환히 빛났다. 네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오늘의 주인공? 괜히 웃음이 났다. 일을 마치고 아들이 랜턴을 넘겨받아 숙제를 했다. 여기에 초 하나를 더한 빛에 의지해 아이들 몸을 씻겨주었다. 아이들은 퍽 재미있어하는 눈치다. 다행히 물이 끊기기 전에 샤워를 마쳤다.
자려고 하니 전기가 돌아왔다! 앗, 그런데 에어컨이 먹통이다. 정전이 반복되는 사이에 고장이 난 건가? 이 밤에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다. 일단 입주민 톡방에 사실을 알린다. 아이들에게 최대한 움직이지 말라고 충고한다. 나는 수많은 여름밤 땀 흘리고 잔 경험이 있기에 대수로운 일이 아니지만, 아이들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너무 쾌적한 환경에서만 살았다. 덥다고 아우성이다. 저렇게 열을 내니 더 덥지. 팬티를 제외한 옷을 모두 벗기고 재웠다. 다행히 잠이 들었다. 소방훈련 하듯 오랜만에 재난훈련 했다 치자, 생각하다 나도 곧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