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8 아직 비바람 속이었음을

노션 AI와 소설 쓰기

by RAMJI

그날 밤 서윤은 준호를 재운 후 곁에 누워 상담사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서윤 씨는 어렸을 때 아버지와 애착관계가 잘 형성되지 않은 것 같아요. 어린 시절 부모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구나, 세상은 살만한 곳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는데, 그게 어려웠던 거지요.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해줄 수 있는 남자를 찾아 결혼하셨을 거예요. 그리고 아버지에게서 받지 못했던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를 남편에게 바라고 계신 것으로 보여요.”


상담실에서는 해주는 말을 가만히 듣고만 있다가, 이제야 되묻지 못했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머릿속을 떠다녔다.


‘무조건적인 사랑과 이해? 그건 부부 사이에 당연한 것 아닌가?’


‘내가 남편에게 너무 많은 걸 바라고 있는 건가?’


‘내가 변해야 하는 건가?’


서윤은 잊고 있었던 첫사랑을 떠올렸다. 엄마 외에도 자신을 이토록 소중히 생각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놀라움을 느끼게 해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그와 다투는 일이 잦아졌고,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하다가 교제한 지 5년 만에 완전한 이별로 끝을 맺었다. 서윤은 당시 가슴속이 찢어지는 것 같은 생생한 고통을 느꼈다. 그때는 변한 그를 탓했다. 그런데 그가 문제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그녀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었다면?


생각은 다른 곳에서 또 싹을 틔웠다.


‘아버지와의 애착에 문제가 있었지만 엄마와는 괜찮았잖아? 그럼 된 거 아니야?’


문득 어머니가 들려준 이야기가 떠올랐다. 서윤은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 시절의 일화였다.


서윤이 만 4살이 되기 전, 어머니는 서윤을 데리고 작은 도시에 하나뿐인 쇼핑몰에 갔다. 없는 살림이었지만 큰 마음먹고 딸 옷을 사서 나가려는 순간, 서윤의 눈에 그렁그렁 맺힌 눈물을 보았다. 왜 그러냐고 물으니 어린 서윤은 “나중에 돈 있으면 저거 사 줄 거지?”라며 거북이 장난감을 가리켰다. ‘노래하는 거북이’라는, 지금도 흔한 장난감이었다. 어머니는 마음속에서 불같은 것이 일어나 그 자리에서 장난감을 계산했다.


어머니는 그저 가난을 떠올리며 이야기했을 뿐이고, 서윤은 다 듣고는 웃어넘겼다. 그런데 곱씹어 생각하니 의문이었다. 네 살배기 아이가 갖고 싶은 걸 말하는 게 왜 그렇게 어려웠을까? 아이가 가난을 구체적으로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아마도 그건 자신을 엄마에게 맞추려는, 그렇게 해서 엄마를 잃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이었을 것이다. "너 때문에 네 아버지와 산다"라는 엄마의 말을 듣고 자란 서윤은 자신이 잘못하면 엄마가 언제라도 떠나버리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혹시 나는… 엄마의 사랑도 온전히 느끼지 못했던 걸까?’


서윤은 자는 준호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었다. 아이의 작고 따뜻한 숨결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준호를 키웠다. 하지만 그동안 잘해왔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이제는 두려움마저 밀려왔다. 자신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것-안정적인 애착-을 아이에게 줄 수 있을까? 서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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