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 비바람이 남긴 것

노션 AI와 소설 쓰기

by RAMJI

서윤은 오늘도 조금 일찍 도착해 상담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잿빛 하늘은 한껏 무거워져 비를 쏟아내고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보기 드문 돌풍까지 휘몰아쳤다. 창틀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가 거인의 휘파람 같았다. 낯설지 않은 이 감각은 서윤을 어린 시절로 돌려보냈다.


서윤이 태어나고 자란 K시는 비바람이 잦았다. 어린 서윤은 강한 비바람에 매혹되곤 했다. 폭풍 직전의 세상은 고요 속에서도 분주히 돌아갔고, 서윤은 공기 중에 떠다니는 긴장감을 가만히 느꼈다. 새 떼들이 서둘러 어디론가 날아가 사라지고, 어른들은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지붕에 모래주머니를 올렸다. 텔레비전에서는 미리부터 현장을 연결해 아직 별 일 없는 바닷가를 보여주었다. 폭풍이 본격적으로 찾아온 저녁, 서윤의 어머니는 방으로 들이치는 빗물을 닦아내셨다. 긴장감 속에서 조금 들뜨는 감정을 느끼며 서윤은 잠을 청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뜨면 순도 백 퍼센트의 해가 거짓말처럼 하늘에 걸려 있었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근데 엄마는 빗물을 닦아내느라 잠을 전혀 못 주무셨겠네…" 서윤이 중얼거리는 사이 상담사가 들어왔다.


"오늘 날씨가 왜 이렇죠. 이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강풍이에요. 이것도 기후변화 때문인가요."


"그러게요, 어린 시절 생각이 나게 하는 날씨네요."


"태풍이 잦은 바닷가에 사셨나 봐요?"


"네, 태풍이 끝나면 하늘이 정말 맑아요. 믿을 수 없을 정도로요."


상담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윤의 표정을 살폈다. "오늘은 서윤 씨 어린 시절 이야기를 해주시면 어떨까 싶어요."




어느 밤, 부모님은 일어서서 팔을 뻗어 서로를 밀어내며 싸웠다. 서윤은 주인집 아주머니 무릎에 앉아 울면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 아주머니의 옷에 토했다. 이것이 서윤이 세상에 대해 가진 최초의 기억이다. 마치 앞뒤가 잘려나간 1~2초짜리 흑백 영상 같은 이 기억이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가끔 의심이 들곤 한다.


좀 더 커서의 기억은 비교적 또렷하다. 서윤의 아버지는 술에 취해 밤늦게 귀가하는 일이 잦았는데, 건넌방에서 자고 있던 서윤은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면 늘 잠에서 깼다. 취한 아버지가 쉽게 잠들지 못하고 쉼없이 말을 했기 때문이다.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이따금 흘러나오는 욕설은 서윤의 귀에도 정확히 들렸다. 손으로 방바닥을 내리치는 소리, 이를 가는 소리, 가끔은 딸꾹질하는 소리도 들렸다. 서윤의 어머니는 참다가 한계에 다다른 듯 어느 순간 ”시끄러워요. 남사스러워서 못살겠네. 이제 좀 자요.”라고 소리를 질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서윤은 안방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한참 듣다가 다시 잠이 들곤 했다. 다음날이면 어김 없이 서윤은 어머니의 하소연을 들었다. 긴 하소연 끝에 어머니는 서윤 때문에 남편과 산다고 말했다. 서윤은 그저 조용히 들었다.


어머니는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있었다. 새벽에 일어나 밥을 짓고, 집 앞 도랑에서 빨래를 했다. 남는 시간에는 전자제품 부품을 조립하는 부업을 했다. 어머니는 그 일을 '풀 전자'라고 불렀는데, 골판지 위에 얇게 펴놓은 풀에는 서윤이 얼씬도 못하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부업의 종류는 다양했다. 여름방학 기간 아침에 눈을 뜨면, 어머니는 집 담벼락이 만들어낸 셋방 문 앞 그늘에 돗자리를 깔고 앉아 크리스마스 트리에 거는 전구 장식을 조립하고 계셨다. 서윤도 곁에서 전구를 끼웠다. 그 일은 서윤에게 놀이였다. 빨강, 노랑, 초록, 파랑 순서로 전구를 작은 소켓에 끼우면 딸깍하고 아귀가 맞는 느낌이 좋았다. 서윤의 어머니는 트리 전구 장식 하나를 장롱 안에 따로 보관했다. 언젠가 집에 트리 장식 할 날이 있을지 모른다고, 당신이 쓰지 못하면 서윤에게 물려주겠다고 했다. 110 볼트 시대가 막을 내려 서윤은 그 전구 장식을 결국 물려받지 못했다.




“엄마는 가난해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지금도 말씀하시는데 저는 우리 집이 가난한지도 몰랐고 불편한 것도 없었어요. 그보다는 부모님이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게 지겹고 싫었어요. 제가 사춘기가 되도록 계속 싸우셨거든요. 서울로 대학을 가게 되어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몰라요. 그 모습을 더 이상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게.” 서윤은 회상했다.


“크리스마스 트리 전구 이야기를 들으면서 서윤 씨는 어머니와 잘 지내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연스럽게 엄마 편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와 보낸 시간이 많았으니까요.”


“아버지와는 어땠나요?”


“아버지는 집에 계실 때가 별로 없었어요. 그런데 전 그게 좋았어요.”


“왜요?”


“집에 계시면 아버지한테 혼나는 게 일상이었어요. 밥 먹는 중에 텔레비전 봐서, 반찬 골고루 먹지 않아서, 정리정돈을 잘하지 않아서 혼이 났어요. 아버지의 호통 한 번에 눈물을 글썽였어요."


“칭찬받은 기억은요?”


“한 번도 없어요.”




서윤이 국민학교 입학 전 전래동화책을 줄줄 암기해서 들려주자 어머니가 놀라 아버지를 불렀다.


"서윤이 아버지, 얘가 책을 술술 외워요. 한 번 보세요."


서윤은 아버지 앞에서 다시 한번 암송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역정을 냈다.


"애들이 원래 다 그렇지 뭘 그걸 가지고..."




“어린아이가 민망했겠어요. 아버지가 정말 엄하게 키우셨군요.”


“그때 제 반응이나 감정은 기억나지 않아요… 아버지 훈육이 앞뒤가 맞지 않다고 느꼈던 건 기억해요. 반찬 골고루 안 먹는다고 야단을 치셔서 아버지가 드시는 반찬을 따라서 집어먹은 적이 있거든요. 그래도 혼이 났어요. 늦잠 잔다고 혼났는데 아버지는 주말에 항상 늦잠을 주무셨고요. 속으로 반항심이 있었어요. 아버지를 존경하지도 않았고요.”


“그랬군요… 돌아보면 부모님이 지금의 서윤 씨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요?” 경청하던 상담사는 또 질문을 던졌다.


“칭찬을 못 받고 커서인지 저는 자존감이 낮아요. 그건 진작부터 알았어요. 그리고 저는 갈등을 싫어해요. 부모님이 다투는 모습을 보며 자랐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누가 화를 내면 위축되고, 가능하면 상대에게 맞추려고 해요. 그래서 제가 원하는 것을 별로 내세우지 않고 양보를 많이 하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원하는 게 뭔지도 잘 몰라요. 제 취향이랄 것도 없고요.” 서윤은 꼭 미리 준비한 것처럼 술술 말하는 자신이 놀라웠다.


“스스로에 대해 깊이 고민하신 게 느껴져요. 저도 그동안 서윤 씨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한 것이 있어요. 짧게 말씀드릴게요.”


서윤은 조금 긴장이 되었다. 몇 주 동안 서윤이 주로 말을 했는데, 상담사가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순간이었다. 단어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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