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경제사 II>, <죽은 원조>
그동안 읽은 경제학 책들의 저자 2인은 원조에 분명히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동안 아프리카에 지원된 원조와 아프리카의 경제성장률 사이에 정의 상관관계가 없다는 것에 내가 무슨 토를 달겠는가. 하지만 쉽게 고개를 끄덕이고 넘어가기에는 찜찜한 것이…
몇 주 전 뉴스를 보니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6624달러로 전 세계의 인구 5천만 이상 국가 중 여섯 번째로 높다고 한다(https://news.sbs.co.kr/news/endPage.do?news_id=N1008008871). 그런데 원조 없이 한국이 지금의 모습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이영훈의 <한국경제사 II> 10장이 해방 후 1950년대까지 한국이 받은 원조를 다루고 있어서 읽어보았다.
해방 후, 미국의 구호원조
1945.8.15. 일본의 항복 선언으로 8월 16일에만 2억 원의 예금이 인출되었다고 한다. 1947년 실업률을 측정하니 서울에서 30%, 경기도에서 24%가 나왔다고 한다.
미 군정기에 미국에서 5억 210만 달러의 원조가 들어왔다. 긴급구호 성격의 물자지원이었다. 식량부족이 긴급한 이슈였기에 식량이 41.6%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다음으로 농업자재(18.8%), 피복(10.2%), 석탄 등 고체 연료(8.1%)와 석유(4.9%) 순서였다.
한국전쟁 후, 미국과 유엔의 원조경제
어렸을 때 역사를 배우면 (근현대사는 거의 배우지 않았음에도) 한국은 아무것도 없이 전쟁의 잿더미에서 다시 시작해야 했다는 다소 문학적인 표현을 접하곤 했다. 이 책에서 한국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처음 숫자로 마주하게 되었다. 전후 사망/실종/피랍/부상을 겪은 남한 인구가 전체 인구의 거의 10%에 달했다고 한다. 1952년 실업자가 인구의 15%였다고도 한다(전쟁 중에 85%가 고용상태였다는 것이 더 놀라운데… 다 농민이었겠지). 아무튼…
전쟁을 계기로 미국의 원조와 함께 유엔의 원조를 받게 되었다. 1945년부터 1961년까지 받은 원조금액이 총 31억 3,730만 달러라고 한다. 내역은 연료와 비료(25.9%), 시설재(22.4%), 최종소비재(19.3%), 공업원료용 농산물(16.8%) 순이다. 1953년 미국의 원조는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10%, 1956년에는 13.3%에 달했다. 이후 1960년 7.6%까지 줄어들었다. 원조가 정부의 재정수입에서 차지한 비중은 1954-1959 평균 42.5% 수준이었다.
이것이 다가 아니다. 미국의 군사원조도 있다. 1946년부터 1961년까지 15억 7,300만 달러의 규모로 받았다. 미군이 발주한 군사용 도로, 교량, 구조물 공사에 한국의 토목건설 회사가 투입되어 미국의 엄격한 감리를 받으며 기술을 습득했다고 한다(이들이 이후 중동으로 가서 외화를 벌어왔나 보다). 또 1950년대에는 8,000명의 군인이 해외 연수를 다녀와 조직과 행정에서 한국 최고의 선진적 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그러다가 쿠데타를…).
원조에 대한 평가
저자는 말한다. 1950년대 원조가 국내 저축의 2~3배였고, 전쟁 이후 한국경제가 이룬 4~5%의 연 성장은 거의 대부분 원조에 의한 투자로 설명될 수 있다고. 당시에 부족했던 소비재를 공급해 주어 사회와 정치 안정에 큰 몫을 했고, 기간산업 건설과 사회간접자본 확충에도 기여했다고.
그럼에도 당시에 부정적 평가가 있었는데 인상적인 내용을 기록해 둔다.
국내 농업 파괴: 면화, 밀, 보리 등 미국산 농산물이 대량으로 국내에 유입되어 국내 농업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렸다. 농지개혁으로 분배된 농지의 10.2%가 매각되고 말았다 한다. 소농들이 얼마나 살기 힘들었는지 짐작하게 된다. 보릿고개가 여기서 나온 말인가.
원조자금 배분 과정에서 정치인, 관료, 기업 간 부정부패, 유착 : 원조물품을 공급받는 기업이 공정환율과 시장환율 차이로 초과이윤을 누렸다(그 규모가 1950년대 후반 국민총생산의 10.5%~15%를 차지할 정도였다).
그런데 70년 전 미국이 한국에 제공한 원조에 대한 비판은 오늘날 원조에 대한 비판과 닮은 꼴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책 <죽은 원조>에 등장하는 유사한 비판 두 가지만 소개한다.
요즘도 원조 때문에 시장 왜곡이 일어난다는 지적이 있다. 미시적으로 효과가 있는 사업도 거시적으로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고도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말라리아 퇴치를 위해 모기장을 보내주면, 아프리카 국내의 영세한 모기장 사업체들이 망한다는 것이다.
원조자금의 배분을 둘러싼 부정부패도 마찬가지다. 원조가 지대추구를 지원한다는 비판이 거세다. 2004년 5월, 미국 국회 공청회에서 전문가들은 세계은행이 개발차관 중 1000억 달러어치의 부패에 연루되었다고 주장했다 한다. 우간다에서는 1990년대에 원조로 인한 부패가 만연해져서 교육 부문 정부지출금 1달러당 20센트만이 지역의 초등학교에 지급되었다고 한다.
70년째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이후 한국은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니 말이다. 똑같은 원조자금이 한국에서는 정부의 부족한 재정을 보충해 개발에 투자되었다고 하고, 지금 아프리카에서는 국민의 세금을 대체해 버렸다고 하는데 무엇이 그 차이를 설명할 수 있나. 한국에 부정부패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에 따르면, 중남미와 아프리카 국가들이 식민 지배를 받던 당시 갖고 있던 착취적인 제도를 독립 후에도 그대로 유지하면서 성장에 실패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저자는 농산물 수매기구를 예로 들었다. 영국 식민 정부는 농산물을 중앙 정부에서 거두어 일괄적으로 가격을 정했다. 정부가 매긴 가격은 공정하지도 않았고, 농민에게 생산성 향상을 위한 인센티브로 작용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 제도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예로 가나의 코코보드는 카카오를 수매하는 정부기관인데 적자를 면치 못하고 있다.
책을 읽던 당시에는 조금은 단순하게 또 조금은 감정적으로 생각했다. 영국이 잘못했다, 독립 후 가나 정부가 잘못했다 정도로. 그런데 이번에 <한국경제사 II>를 읽으며 다시 생각해 보니, (프랑스혁명이나 공산 혁명 수준의) 말 그대로 혁명이 일어나지 않고서야 과거의 제도가 역사를 통해 면면히 이어지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한국에서는 1945년 해방 후 미군정의 시대가 열렸다. 미군은 일본이 갖고 있던 총독부의 통치제도와 관료기구를 그대로 계승했다. 일본인은 모두 물러갔지만, 총독부에서 일하던 조선인 관리와 경찰은 모두 현직을 유지했다.
1953년 정부가 한국산업은행을 발족하면서,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의 통제 없이 독자적 권한으로 산업금융을 지원하도록 했다. 이영훈은 이것이 일제의 식산은행을 계승한 은행이라고 하면서, 결과적으로 일제 치하에서와 동일한 구조로 금융 제도가 재건된 것이라고 말한다.
법령도 마찬가지다. 1948.7.17. 제정된 건국헌법은 부칙으로 “현행 법령은 이 헌법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 그 효력을 가진다”라고 하였다. 그 결과 1905년 이래 (일제강점기) 제정된 법령이 미군정으로,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로 그대로 이어졌다.
식민 정권의 제도를 너나없이 물려받았는데 왜 한국은 성장한 건가? 한국은 어떤 이유에서든 착취적인 제도를 포용적 제도로 스스로 바꾼 것인가? 아니면 애초에 일본이 이식한 제도가 착취적이지 않았던 건가? 대런 애쓰모글루가 개발도상국의 현재 모습을 보고 결과론적으로 이유를 끼워 맞춘 결과인 건 설마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