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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잡담

원조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한국의 성장

한국경제사 II

by RAMJI

이영훈의 <한국경제사 II>11장을 읽고 있다. 지난 10장에서 한국이 전쟁 후 삶을 되찾는데 원조의 역할이 컸다는 것을 알았는데, 이번 장에서는 한국의 본격적인 경제성장의 과정에서 원조는 부차적인 요소였음을 알게 되었다.


1957년, 미국은 가까운 미래에 원조가 삭감될 예정이니 대책을 세우라고 한국 정부에 통지했고, 한국 정부는 외자관리법 제정, 장기개발계획 수립 등의 노력을 이어갔다.


1960년대 군사 정부는, 이승만 정부가 일으켜 놓았던 합판, 면포, 철강재 공업의 (예상치 못한) 수출 증가에 힘입어, 원재료를 수입한 후 가공 조립하여 완제품을 수출하는 조립형 공업화를 중심으로 수출주도형 경제를 이루어나갔다. 수출이 크게 늘면서 달러가 들어오고 신용도가 좋아지고 투자를 더 많이 할 수 있는 선순환이 이루어졌다.


1967년, 한국의 재무부장관은 앞으로 재정계획을 수립할 때 미국의 원조기관인 유솜(USOM)의 관여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1970년을 마지막으로 17년 만에 미국의 원조를 졸업했다.


1970년대 들어서면서 중화학공업에 대한 투자를 단행하여 수출 품목에 있어서 큰 변화를 꾀했으며 1980년대 이후 소기의 성과를 거두게 된다.


한국이 원조를 졸업한 것은 물론이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요인은? 우리나라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은 들어본 질문이 아닐까. 박정희의 리더십 덕분? 높은 교육열과 근면성실을 탑재한 국민성 덕분? 이 또한 한 번은 들어본 답변들일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면서 한국의 성장에 우호적이었던, 어떻게 보면 우연과도 같은 역사적 조건들이 눈에 띄어서 글로 정리해보려고 한다.


한국의 이른 독립 + 냉전 = 미국의 전폭적인 원조


일본에 원자폭탄이 터지면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 일본의 패전으로 인해 한국은 즉시 독립할 수 있었다. 하지만 승전국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 국가들이 독립한 것은 코파일럿에 따르면 대체로 1960년 전후라고 보면 되겠다.


1951 리비아

1952 이집트

1956 수단, 모로코, 튀니지

1957 가나

1958 기니

1960 카메룬, 세네갈, 말리, 콩고(레오폴드빌), 마다가스카르, 소말리아, 나이지리아, 니제르, 부르키나파소, 코트디부아르, 차드, 중앙아프리카공화국, 콩고(브라자빌), 가봉

1963 케냐

1964 말라위, 잠비아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말 그대로 한국과 아프리카에 주어진 시간이 달랐다. 미국의 원조자금은 한국에 집중적으로 지출되었다. <죽은 원조>의 저자 담비사 모요는 “미국은 1957년~1990년까지 아프리카 53개국에 지원한 원조금을 모두 합친 것만큼의 금액을 오직 한 국가, 바로 한국에 쏟아부었다고 추정된다”라고 하였다. 소련, 그리고 막 공산화한 중국과 북한 아래 대롱대롱 붙어있는(?) 지정학적 조건 때문이었을 것이다.


일본 귀속재산 처분과 함께 공업화 시작, 이것이 수출로 이어지고…


1950년대에는 미국의 원조를 물자로 받다가 1960년대에는 차관으로 받았다 하는데, 미국이 대체로 반대하기는 했지만 이승만 정부는 없는 살림에도 공업화를 추진했다. 이영훈의 책을 보니 여기에는 미 군정이 일본 민간인들에게서 빼앗아두었던 귀속재산의 처분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 같다. 오늘날 대기업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작이 귀속재산의 취득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아프리카가 갓 독립했던 1960년대, 한국의 군사정부에게 찾아온 행운이 있었다. 이승만 정부가 일으켜놓았던 면포, 합판 산업 등에서의 수출이 늘어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의 요구에 따라) 무역수지 적자를 줄여야 했던 한국은 적극적으로 수출 확대를 위해 노력하게 되고, 이것이 수출 주도 경제정책으로 진화하게 된다.


일본(의 과거) 따라 하기


이영훈에 따르면 서유럽과 일본은 1950년대 후반이 되면서 전후재건을 마치고 고도성장을 시작하고 있었다. 특히 일본은 본격적으로 중화학공업을 발전시켜 나가는 단계에 있었다. 한국은 일본에서 사양 산업이 되어가는 노동집약적 경공업을 받아다가 발전시켜 이를 수출품목으로 삼았다. 주요 시장은 일본과 미국이었다.


1970년대 초에도 그랬다. 당시 일본은 공해를 유발하거나 노동집약적인 중화학공업을 더 이상 추구하지 않게 되었다. 그것들을 한국으로 옮겨오기 좋은 상황이었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여담이지만 일본이 잃어버린 30년을 겪는 사이 한국이 가졌던, 우리도 일본처럼 될 거라는 불안도 이런 과거의 경험과 연결된 감정이겠구나 싶다. 1인당 경제규모가 일본과 대등해진 지금은 어느 때보다 미래 불확실성이 크다는 생각도 들고.)


정부 개입이 가능했던 막간을 누렸다


한국정부의 경제에 대한 강력한 개입도 눈에 띈다. 1956년에 정부는 국내 면방직업을 보호하기 위해 외국산 면제품의 수입을 금지했다. 환율도 정부가 정했다. 공정환율이라는 걸 적용해서 원조자금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고자 했다 (미국의 압력으로 조정해야 했지만). 수입의 권리와 수출의 의무를 연계시킨 수출입링크제라는 것도 있었다.


하지만 세계경제는 자유무역을 지향하고 있었다. 1958년이 되면 서유럽과 일본의 전후복구가 완료되어 주요 국가들 간의 자유무역이 시작되었다. 수출을 지향하는 한국 입장에서는 언젠가는 따라야 할 길이었다. 한국 경제가 성장 일로에 접어들면서 박정희 정권은 그간의 무역제한조치들을 포기했다. 수출입링크제를 폐지했고 1965년에는 고정환율제를 변동환율제로 바꾸었다. 1967년에는 GATT가 한국의 무역자유화 정책을 평가하여 한국을 회원국으로 초대하였다. 자유무역의 거스를 수 없는 흐름 속에서 한국은 자신에게 최대한 유리하게 보호정책에서 개방정책으로 노선을 바꾸어 갈 수 있었던 것 같다. 60년 전후로 독립한 아프리카는 겪지 못한 환경일 거란 생각이다. 한국이 1950년대~60년대 중반까지 택했던 보호정책의 효과가 얼마나 컸는지 책에는 따로 언급되어 있지 않은데, 경제학자 장하준은 제조업 발전과 함께 이를 성장을 위한 중요한 요소로 간주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요약하면 한국은 아프리카와 달리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경제성장으로 자립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가 흔히 듣는 개발독재나 우수한 인적자원 외에도 이 성과를 설명할 수 있는 다소 우연적인

요인이 있다. 1) 이른 독립과 냉전 체제 하에서 미국의 집중 지원을 받을 수 있었던 여건, 2) 일찍이 50년대부터 추진한 공업화와 60년대 이후 나타난 수출 성과가 수출경제정책 시행으로 이어진 상황, 3) 일본의 선례를 따라가면 되었던 상황, 4) 전후 재건과 본격 자유무역 시대 막간에서 보호주의 무역정책을 시행할 수 있었던 여건이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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