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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muse Oct 26. 2023

신지 못하는 운동화

우리는 모두 언박싱하지 못한 것들이 하나씩은 있다

연예인들이 자기 집을 소개하는 관찰 예능을 보다 보면 자주 보이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신발 수집하는 데에 취미가 있는 연예인들이 꽤나 많다는 것이다. 일례로 미우새에 나오는 이상민만 보더라도 채권자의 집에서 임대살이를 하고 청산할 빚들이 아직까지 수두룩한데도 자신이 보유한 신발만큼은 팔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도 몇십 켤레가 아닌 몇백 켤레나 된다니 신발에 대한 애정이 어마무시하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신발을 신기 위해서 모으는 것보다 미술관에 작품을 전시하듯 진열장에 신발을 세워놓고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들이 대다수라는 것이다.


이런 고급 취미를 가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니 왜 신지도 않을 신발들을 뭐 하러 저렇게 많이 사서 진열해 놓지?’ 하는 한심한 생각이 드는 게 솔직한 내 마음이다. 물건은 무조건 실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눈요깃거리도 한 두 개면 그만이지, 몇백 켤레나 되는 신발을 신을 목적이 아니라 소장하고 전시하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것도 저렴하면 몰라.’ 나는 철없는 아들을 둔 엄마처럼 내가 이해되지 않는 선상에서의 행동에 신랄하게 비판하던 찰나, 거울을 보듯 나에게서도 그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다.


어리석게도 나 또한 닳을까 봐 신지 못하는 운동화처럼 조마조마하며 꽁꽁 싸매던 일이 많이 있었다. 작품을 그려 일러스트페어에 전시하는 일,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구상하여 특허청에 출원하는 일, 그리고 좋은 사람을 만나 서로에게 뮤즈가 되어주는 일. 운동화처럼 물질은 아니지만 분명한 건 내가 아끼고 아끼는 일들이어서 아직까지 시작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선 동일한 맥락이다. 나에게 버킷리스트이자 소망이고 목표이기 때문에 행여나 시작했을 때 수포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서 무기한 미루었던 일들이다.


차라리 하고 싶은 게 없었다면 좀 나았으려나. 그저 하루의 일과를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것만 해결되면 만족하는 원시주의자처럼 살았다면 다행이었겠지만 불행히도 남들에 비해 자아실현의 욕구가 큰 나는 결코 그 삶에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안 봐도 비디오다. 신지 않을 신발을 수집하고 그저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던 사람들처럼, 나도 언박싱하지 않을 일들을 메모장에 적으며 ‘언젠가는 이루리’ 하며 꿈을 차곡차곡 수집하기만 하던 지난날을 반성해 본다. 이제는 그냥 바라보지만 않고 실천해야겠다. 우선 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니는 그림들을 종이 밖으로 분출시키는 일부터 해보자. 곧 있을 디자인 페어도 구경가보고 아이패드 드로잉 작업도 슬슬 시작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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