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 내린 비가 우리를 낯선 곳으로 데리고 간거야
둘째날 -비와 함께 둘째날의 2부가 시작됐다-
가상의 마을 들을리. 아, 이곳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 무슨 이야기를 해야할지 퍽 난감하다. 잠시 꿈을 꾼듯한 착각마저 이는 곳. 작년 3월, 나홀로 강릉 여행을 준비하면서 우연히 알게 된 공간이다. 무려 1년이 넘는 기간동안 내 주변에서 관심 가질만한 지인들에게 링크를 찔러가며 가야할 이유를 만들고자 했건만 기회를 얻지 못했다. 인간사라는 것이 되어야하는 순간에 되어지는 자연의 순리를 따르는 탓일까. 이번 여행은 애쓰지 않은 상태에서 기대치도 예상치도 못한 인연들을 서로 이어주는 초석이 돼주었다. 마침 이 사람들과 하필 이 때 왔어야만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강릉 산자락 끝 조용한 마을, 자갈밭으로 들어오는 바퀴 소리와 요란한 인기척에 대문을 가리고 있는 흰 무명천이 걷히고 나타난 소향의 호스트 소연님. 옆구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를 한쪽으로 쓸어내리고 발목을 덮는 새까맣게 하늘거리는 옷을 입은 여장부 혹은 숲과 마을을 보호하는 정령같은 기운을 뿜으며 소연님은 우리를 환히 맞아주셨다. '와, 저 분 기운이 장난 아니야.' 일행들에게만 조용히 던진 나의 첫 마디. 대개 사진으로만 보던 공간에 실제로 들어설 때면 내 상상력에 입체감이 더해지는 정도인데, 들을리 소향은 내 상상력의 부족함을 비웃듯 인터스텔라 같은 무한한 차원의 압도감을 주는 곳이라는 게 첫인상 이었다. 1박 2일 일정의 시작이었던 준비된 첫 식사도 충격이었다. 아니 뭐 이런게 다 있지? 처음 먹어보는 올리브밥, 파래김에 얼린 두릅과 아보카도를 싸먹는 국적초월 대화합, 바삭한 버전의 강원도 고추장떡, 며칠 전 해먹은 우리집 쑥버무리가 맛없었다는 걸 증명하듯 자꾸 손이 가던 쑥버무리, 그리고 꾸밈새 없이 단정하지만 화려했던 감자국! 공간도, 호스트 소연님도, 우리의 대화도 현실감각 증발되는 시크릿가든 그 자체였다. 피곤하면 머리를 뉘이고, 일상에 비상이 걸리면 노트북을 꺼내 일을 해도되는 자유롭고 너그러운 비관광적 여행 공간. '인생은 여행'이라 말하던 이들의 참 뜻은 아마도 이런것 이었으리라. 관광과는 엄연히 다른 여행. 짜여진 계획과 순서의 주체를 나에게서 순리에게로 기꺼이 내어주고, 비가오면 오는대로, 날이 개면 개는대로 자연의 속도에 맞게 변형하는 인생. 우리의 삶도 그러해야 할 것이다. 아스팔트의 속도가 아닌 숲의 속도로 가는 것. 그 여행을 제공하는 공간이 바로 들을리 소향이었다.
들을리의 여러가지 체험 중 내가 가장 기대했던 것은 Earthing. 맨발로 대지를 걷거나 바닷물에서 수영을 하고 놀거나 나무에 몸을 부딪치는 것을 뜻하는 어싱은 자연에서의 삶을 동경하는 나에게 꼭 맞는 트라이얼이 되어줄 것 같았다. 우리의 어싱은 하늘이 적절히 비를 내려준 뒤라 맑고 화창한 날씨일 때보다 곱절의 땅 내음과 온갖 산 소리가 더 짙게 몸 속으로 스며드는 행운을 얻었다. 궁궐 목재 용도로 일궈진 200년 넘은 소나무 숲, 그 중턱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신발을 벗어두고 산을 오른다. 결코 손에 신을 들고 오르지 않는다. 약한 나의 의지가 언제라도 손에 들린 신을 신겨주려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을 버려두고 떠나야한다. 원래부터 내것이 아니었던 것 처럼. 비가 내려 축축해진 땅이 발가락 사이를 파고들어 치댄다. 차가웁고 저릿하다. 솔잎이 낙엽이 돼 떨어진 곳은 포근하고 부드럽다. 땅에 이불을 덮어둔 것 마냥 나도 그 위에서 사뿐거린다. 생각했던 만큼 좋다! 라고 방심하는 순간, 돌길과 흙길이 등장한다. 따란, 요곤 몰랐지? 라며 도시인간들을 약올린다. 포기하지 않을 만큼만 아파하며 걷는 사람, 맨발이 맞나 의심이 들 정도로 거침없이 걷는 사람, 모든 것에 초연해 보이는 호스트. 까악 까악 까마귀 울음 소리가 깨진 유리조각을 밟는 듯 고통스럽다는 일행의 비명과 겹쳐 들릴 즈음 우리는 어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왔던 길을 돌아가지 않고 빙 둘러 가는 루트를 고안한 소연님은 포기와 유예, 합리화에 내성이 생긴 사람들에게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메시지를 발바닥으로 깨닫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있다고 했다. 지금 내 발 아래 고통도 바로 한 걸음을 떼고 옮기면 지나갈 뿐이다. 고통 뿐이겠는가. 즐거움도 그러하다. 한 걸음 후에 다시 돌길이 펼쳐질지 어찌 아는가. 그러므로 일희일비 하지 말라는 것. 나는 <무탄트 메시지>가 떠올랐다. 우리가 이 땅에 양수를 터치고 맨 몸으로 나온 것은 바로 그 맨 몸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는 의미. 하나님은 나에게 필요한 것을 이미 다 주셨다. 도대체 뭐가 더 필요하다고 갖추고 살았을까. 군더더기들을 떨구고 진짜를 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우리는 회복해야한다.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삶은 어떤 모양일까? 내가 뭘 하길 바라실까? 나를 어떻게 지으신걸까?'
도피가 아닌 제자리를 찾아가는 Earthing 이었다. 끝나지 않는 회사 업무를 업고 산에 오른 소현언니가 잘 해결됐다는 메시지 한통에 부스터를 단 듯 성큼성큼 걸어나갔던 것 처럼 마음의 찌꺼기를 버리고 가볍게 걷자. 고통은 단순히 자극일 뿐이고, 어쨋든 나는 앞으로 나아가고 있으니까. 계곡물에 발을 씻고 다시 신발을 신었을 때 발 전체가 뜨끈해지면서 야트막한 동네 뒷산을 오를 때도 팅팅 붓곤 했던 손까지 가벼운 온기로 감싸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가 혈관을 운동하며 나에게 말해주었다. 역시 인간은 땅을 밟고 살아야한다고. 편리라는 거짓의 안대를 쓰고 도시라는 매트릭스 안에 갇혀 두 손을 허우적거리며 방랑하고 있지는 않느냐고.
매트릭스 안에서는 매트릭스를 볼 수 없다. 출구는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