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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Jun 19. 2021

고양에 산다, 고향에 산다

 탄현마을에는 내가 산다. 기억나지도 않는 하찮은 이유로 친구들과 숨 넘어가게 웃느라 괄약근 조절도 못하던 하교길 돌계단에 열 세살의 내가 산다. 열 다섯, 친구들과 하릴없이 쏘다니던 동네 골목길도 여전하다. 열 여섯,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 함께 과외를 받던 친구들과 자정을 넘겨 들뜬 정신으로 헛소리를 늘어놓던 삼거리 횡단보도는 라인을 하나 추가한 것 빼고는 그대로다. 나의 첫사랑과 첫키스가 이곳에 있고, 눈물의 이별도 지워지지 않았다. 수능 끝난 후 아빠에게 첫 술잔을 받았던 호프집도 감사히 버텨주고있다. 가족 외식으로 시작해 친구들, 남자친구(들)을 대동하고 다녔던 막창집과 곱창집도 아직 명성을 잃지 않았다. 중고등학교 시절 뻔질나게 드나들던 쟁반노래방도, 그 시절을 추억하며 출신 초등학교 구령대에서 핸드폰으로 노래를 틀어놓고 희은이와 가무를 즐기던 밤도 기억난다. 봄이면 구태여 멀리 나갈 필요도 없이 꽃구경을 시켜주는 동네 명소도, 마지막 지하철을 놓치면 내리곤 하던 버스정류장의 밤품경도 기억속에 그대로인데. 그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백반집과 막걸리집, 꼬치구이집, 치킨집은 다양한 이유와 세월의 무게에 문을 닫고, 20대가 되어 퇴근길에 간혹 마주치던 친구들은 출가하고 독립을 해 동네를 떠났다. 


 영화 <리틀포레스트>를 처음 봤을 때 나는 문자 그대로 '충격'을 받았다. 그런 형태의 삶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영화를 통해 처음 알았기 때문이다. 서울 토박이라고 할 순 없으나 이렇다 할 고향이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오히려 극중 혜원이처럼 내겐 심겨진 토양이 없다는 사실에 오래도록 속상해 했다. 나는 떠나고 싶어도 떠날 곳이 없었다. 어딜 가든 외지인이고 연고라고 우길만한 꺼리도 없다. 그런데 오늘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에 연체한 책을 반납하고 돌아오는 그 짧은 15여분 동안 고향이라는 존재의 부각과, 심지어 여전히 고향을 떠나지 않고 살고있는 나 자신을 깨달았다. 난 곳은 아니지만 충분히 나를 키워준 곳이다. 탄현마을로 불리는 이곳이 나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공동체와 뿌리, 귀촌과 마을을 고민하고 소망했던 긴긴 시간이 나를 이와 같은 깨달음으로 데리고 와주었다. <응답하라 1988>의 쌍문동 이웃사촌들처럼 내가 동경하는 마을 생활을 하고있진 않지만 여전히 나는 이 동네를 사랑하고, 사랑하는만큼 변하지 않기를 바라고 바란다. 59층짜리 주상복합이 들어서며 스타벅스가 생기고 버거킹이 들어올 때도 나는 서글펐다. 편리함은 늘지 몰라도 ‘탄현마을’에 어울리는 소박함과 정겨움, 불편함은 점점 사라질테니 말이다. 


 서울시의 공유 자전거 따릉이보다 10년은 더 앞섰던 고양시의 피프틴이 6월부로 운영을 종료했다. 따릉이와 병행 사용해 본 결과 피프틴의 불편함과 관리의 허술함을 부정할 순 없었지만 108만 고양 시민의 큰 행복 하나가 줄어든 셈이다. 적어도 나는 발이 묶인 신세가 되었다. 오늘같이 쉬는 날이면 피프틴을 타고 호수공원이든 밤리단길 카페든 경의선 산책길이든 자유로이 다니던 최고의 취미, 유일한 운동, 효과적인 명상 수단이 사라진 것이다.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시끄러웠던 GTX가 완공을 눈앞에 두고, 인천선과 연결이 되느니 마느니 할만큼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마을은 부디 그대로이길 바란다. 마을은 사는 사람들이 행복하고 편안하고 안전한 곳이 되어야 한다. 내가 이 곳을 오늘 처음 고향이라고 느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고 또 무척 감격스러운데 이젠 이 들뜸을 함께 나눌 사람이 없다. 촌을 떠나는 젊은이들처럼 나의 산(living) 추억들도 모두 서울에 새 터를 잡았다. 부디 그들도 그곳에서 마을을 이루며 살기를 바란다. 그러나 나 또한 남겨진 이곳에서 이 마을을 지키며 새로운 추억을 쌓아갈 것이다. 소중한 이 마을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누릴 때에야 진정한 기쁨이, 고향의 완성이 되기 때문이다. 눈물을 그렁이는 등 뒤로 '안녕 나의 청춘'을 읊던 덕선이의 대사와 함께 모두가 떠나 텅 비고 헐린 쌍문동 골목길을 훑는 쓸쓸함이 허무함으로만 끝나버리지 않길, 나의 고향을 나의 마을을 나의 공동체를 지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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