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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Feb 19. 2022

위로에 드는 품


 여유가 없어서라고 생각했다. 나에게 ‘시간’만 주어진다면 갓 방학식을 마친 초딩처럼, 날개 옷 되찾은 선녀처럼, 고백에 성공한 모태 솔로처럼 세상을 다 가진 것 마냥 훨훨 날아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1년 동안 퇴사 날짜가 적힌 사직서를 마음에 품고 있었던 나는 비로소 그 날을 맞이하면 백수가 과로사 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 자신했다. 그런데 웬걸? 내일은 없다는 해방감으로 원없이 술을 들이킬 수 있는 날은 고작 나흘 뿐이었다. 나의 마음은 그 자신의 몸에 예기치 못한 빗장을 걸어 잠그고 방 안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가슴이 답답해 억지로 숨을 들이 마시고 내 뱉어야 했다. 목이 뻐근해 슬쩍 돌렸을 뿐인데 존재감 없이 깊은 곳에 자리한 어깨 근육이 심하게 놀라 일주일 넘게 담이 풀리지 않았다. 무기력하고 매사에 재미가 없었다. TV에서 오락물이 나오고 있어도 머릿속에 무언가를 집어넣고 싶지가 않아 모든 것을 차단할 수 있는 내 방 한구석으로 자꾸만 파고들었다. 적어놓은 계획은 빼곡한데 지울 수 있는 건 하나도 없어 무력감과 자괴감만 날로 커졌다. 병원은 내가 특별히 예민하고 스트레스에 취약한 사람이라고 진단 내렸다.

 

 불행 중 다행히 매일 연락을 주고 받는 남자친구가 유일한 말동무가 되어 주었다. 요 며칠 풀 죽은 목소리와 무미건조한 태도인 나를 대하기가 그도 어지간히 불편하고 힘들었을 것이다. 애석하게도 감정의 시야가 한껏 좁아져 있던 나는 그를 향한 미안함은 외면한 채 그의 마음을 독차지하려는 듯 굴었다. 집에서 아무와도 대화하지 않고 지내면 당연히 우울해질 수 있다고, 앞으로 할 일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고 기약 없는 쉼 앞에서는 충분히 무기력할 수 있다고, 그래도 내가 네 옆에 있겠다고, 그는 여전히 내게 다정했다. 너른 마음과 따뜻한 인내에 나는 조금 힘을 낼 수 있었다. 그의 위로에 울어버릴 용기도 낼 수 있었고 머쓱하게 눈물을 닦아 낸 후에는 한결 가벼워진 기분도 들었다. 그럼에도 그의 위로와 눈물 몇 방울이 문제를 해결해주는 건 아니었다. 그의 위로가 끝나고 나면 3평짜리 방 한구석에 쪼그려 앉아있는 나로 재빠르게 돌아왔다. 위로는 그저 그 순간 위로에 그쳤다. 위로의 힘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

 

 다음 날은 그가 내내 불편해했던 목 상태를 확인하러 이비인후과에 간다고 했던 날이었다. 진료를 마쳤는지 메시지가 왔다. 

성대결절 초기래…

 말 하는 게 직업인 그는 언제나 가시지 않는 두려움을 이고 살아왔다. 처음 목에 이상을 발견했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누가 말이라도 걸까봐 늘 책상에 엎드려 있었다고 했다. 이대로 살아서 뭐하나 죽을까도 생각했고, 평생 벙어리로 살게 될 것 같아 수화를 배우려고도 했단다. 

 진단을 받고 온 주말에는 그가 한 달 동안 공들여 준비한 이틀짜리 강의가 예정돼 있었다. 우선 급한 대로 대타 강사를 구하고 그가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최소화 시켜 나갔다. 그가 이 강의를 위해 얼마나 고민하고 고생했는지 쭉 지켜 봐왔던 나는 그와 함께 허탈에 잠겼다.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 지 한참을 고르고 또 골랐다. 내 말이 어떻게 들릴지, 단어의 조합일 뿐인 그저 말이 정말 힘이 될 수 있을지, 무슨 말도 해도 결국은 가닿지 못할 것 같아 조바심 마저 났다. 그는 다음날로 예정되어 있던 나와의 약속도 이틀 뒤로 미루고 칩거에 들어갔다. 뭐 하고 있는지 물으면 블라인드 친 방에 그저 누워 있다고 메시지로 말했다. 성대결절 진단을 받은 이후 그의 목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했다.

 

 헛웃음마저 났다. 하루 차이로 상황이 뒤바뀐 것이다. 결코 환영할 역전도 아니다. 그에게 위로가 될 방법을 재차 생각해내려 했지만 바로 전 날 위로의 가치에 대해 냉소한 나였다. 어떤 말도 그에게 진정한 위로가 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말의 가벼움 앞에서 무력했다.

그가 이런 마음이었겠구나. 

나를 살리려는 절박함으로 그런 말을 했겠구나. 

그는 최선을 다해 나를 위로했구나. 

 내가 받았던 그의 위로는 사실 지구에서 우주로 쏘아 올리느라 무진 애를 쓴, 9배나 힘을 들인 무거운 위로였다. 나는 내가 받은 위로의 무게보다 9배 가중된 힘을 받았던 것이다. 그저 마음이 강퍅한 내가 그 몫을 오롯이 받아내지 못했던 것 뿐이다. 그가 들인 위로의 품이 내 몫이 되어보니 그의 수고와 사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에게 위로는 더이상 의미 없는 ‘말 뿐인 말’이 아니었다. 위로는 엄청난 힘을 가지고 우리에게 온다. 위로의 수취인도 그 힘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도록 미약하게나마 품을 들인다면, 우리는 위로를 오해하지 않고 보다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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