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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Feb 17. 2022

내 멋대로 독립

 서른 둘이 열 둘의 나이였을 때 이사 온 집. 그 유구한 집을 떠나지도 않고 여태 살고 있다. 5살 터울의 동생은 이른 나이에 자가용을 마련했음에도 서울과 일산을 오가기 힘들다며 출가한 지 오래다. 같은 처지에 있다고 핑계 댈 동지도 없이 나는 여전히 엄마가 빨래를 하고 아빠가 공과금을 대는 집에 얹혀 살고 있다. 그들은 여태 단 한번, 은근하게라도 내게 독립에 관해 언질을 준 적이 없다. 오히려 결혼하기 전까지는 나갈 생각 말라고 신신당부할 정도이다. 뒷짐에 감춰놓은 진심 이야 뭐가 됐든 그들이라고 머리 크고 성깔 있는 나이 많은 딸과 부대끼며 살고 싶으실까. 기성 세대 표현에 따라 ‘요즘 애들’이 얼마나 살기 고달픈데 하는 연민과 책임감으로 나를 떠안아주고 계신 거겠지. 참 감사한 일이다.

 이토록 큰 어버이의 은혜에도 불구하고 앞서 말했듯 나는 머리 크고, 성질 나쁜, 적잖은 나이의 요즘 애들이라 부모님과의 동거 난이도가 해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을 느낀다. 이쯤 살았으면 서로 캐릭터 분석도 되고 위험 신호들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지혜롭게 살 법도 한데, 나는 지혜와 지략이 부족한데다 철까지 덜 들었나 보다. 


 지혜로운 옛 선조들은 나이 서른을 ‘이립(而立)’이라고 칭하며 모든 것에 확고하게 서는 때라고 이름 붙였다. 나는 이 표현이 ‘모든 것으로부터의 독립’ 으로 들렸다. 그렇게 스물 아홉에 들어섰을 때부터 독립이라는 키워드에 꽂혔다. 관계에서의 독립, 자아로부터의 독립, 경제적 독립 등을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다른 건 내 의도대로 되는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유독 경제적 독립에서 만큼은 타협과 태세 전환이 빨랐다. ‘2030을 횡단 중인 수도권 생활자’라는 작금의 현실에서는 최대한 그 시기를 늦출 수 있다면 늦추는 게 현명한 처사일지 모른다는 약삭빠른 생각이 든 것이다. 전철역까지 도보로 10분 내외인 33평형 아파트를 소유한 나의 부모님을, 아니 부모님의 집을 떠나 굳이 고생할 필요가 뭐람! 물론 또래 자취러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불편함을 아우르는 단 하나의 결정적 이점을 주는 독립에 대한 찬양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 어느정도 로망은 있었다.

 독립에 대한 양가 감정, 누구도 강제하지 않은 부채 의식과 선망을 동시에 갖게 된 나는 같은 시기에 고된 회사 일과 미성숙한 감정 처리로 부모님과 잦은 트러블을 겪고 있었다. 충동 적이었을지 몰라도 그 때부터 본격적이고 진지하게 독립을 도모하기 시작했다.


 나의 독립 투쟁기는 나름대로 서사가 있어 크게 세 차례의 시행착오를 겪었다. 첫번째는 말 그대로 가출이다. 물론 내 컨셉은 약삭빠른 여우이기에 적극적 부동산이 아닌 소극적 에어비앤비를 검색하는 일로 시작했다. 여러 후보 군을 물색하면서 서울의 높은 숙박료에 아연실색하기를 여러차례. 결국 지난 여름 소박하게 4일 동안 묵을 집을 구했다. 가을 깨에는 동료를 통해 알게 된 옥탑에서 일주일씩 2번, 총 2주 동안 집을 나와 살기도 했다. 이 하찮은 독립 경험에서 나는 난데없는 자신감을 얻어왔다. ‘오~ 이대로라면 해외에서도 혼자 살겠는데?’라는 생각에 까지 미쳤다. 제대로 미친 것이다. 그 자신감은 일상의 얄궂음 까지 들어가진 못한 채 여행의 낭만만 적당히 맛보고 나올 수 있는 고작 2주짜리 독립이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오히려 나라는 사람의 현실은 다음과 같다. 내가 썩 마음에 든 집주인이 12월 한 달 동안 살아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왔을 때 긴 여행이 예정되어 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단 이틀짜리 여행이었는데도 말이다. 한 겨울 옥탑의 열악한 환경을 구태여 겪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게 내가 맞닥뜨린 나의 민낯 이었다.


 ‘집 나가면 개 고생’이라는 격언을 품에 안고 귀환한 나는 경험에 근거한 새로운 철학을 마련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사는 대신 결혼 자금 이라던가 노후 준비를 위해 저축을 하는 편이 N포 세대로서 하나라도 덜 포기하는 기반을 마련하고, 증가하는 1인 가구 주거 쟁탈전에서 경쟁을 줄여 공익에 기여하는 것 아니겠냐는 결론이다. 아무튼 간에 곱게 포장한 철학에도 불구하고 나만의 공간, 은둔할 수 있는 피난처에 대한 필요가 줄어들 리는 만무하다. 하여 나는 독립 두번째 방법으로 배회를 선택했다. 

 우리는 군중 속에서도 은둔할 수 있다. 소요 가운데서도 고요할 수 있다. 우리가 사는 시대의 비애이자 특혜인 것이다. 나는 나를 모르는 무수한 타인들 속으로 들어감으로써 독립을 꾀했다. 부모님 덕으로 수도권에 사는 호화를 누리는 나는 살면서 다 가보지도 못할 정도로 많은 멋진 식당과 카페, 쉴 공간들을 알고 있다. 그 중에는 한 번으로는 부족하여 자꾸만 생각나 아지트로 삼게 되는 곳들도 있다. 이른 퇴근을 하거나 평일에 쉬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애정 어린 그 공간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나는 적당한 자유와 다채로운 경험, 더불어 경제적인 안도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최고로 균형 잡힌 독립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호시기를 누리던 나의 독립 투쟁기는 돌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퇴사를 하게 된 것이다. 말인즉, 고정적으로 통장에 출입하던 돈이 다시 들리겠다는 기약도 없이 작별 인사를 한다는 뜻이고, 그 돈 대신 넘치는 시간이 우르르 들어온다는 뜻이기도 했다. 나는 시간 벼락 부자가 됐다. 그러자 자연스레 독립 생태계에도 변화가 생겼다. 

 나는 현재 창조를 통해 독립을 일구고 있다. 나의 창조는 없던 것을 생성하는 창조가 아니다. 내가 가진 것을 최대로 활용하는 창조, 익숙한 것을 낯설게 만드는 창조, 소비하지 않고 향유하는 창조다. 내 주변 환경을 갈아엎었다. 먼지떨이개로 슬쩍 훔쳤을 뿐인데 공기 중에 많은 것들이 떠다녔다. 4년 넘게 일에만 전념하느라 돌보지 못했던 삶의 먼지들이었다. 한 쪽 벽면 가득한 책들을 골라내고, 물건 더미에 묻힌 피아노에 제 모습을 찾아주고, 옷장과 장식장을 추리니 방이 한층 단출해졌다. 물건 뿐 아니라 건강과 마음, 주변 관계도 정돈했다. 새로 마련된 물리적, 심리적 공간에서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오롯이 나에 대해 생각한다. 가진 것들을 비우고 재배치했을 뿐인데도 공간은 아주 효과적으로 넓어졌고 그로 인해 머릿속 공간에서는 자꾸만 꿈을 꾸게 되었다. 그 공간이 비로소 진정한 독립을 이루는 길로 나를 들어서게 만들어 준 것이다. 


 현대인의 시간은 옛 선조들의 시간보다 효율적으로 쓰이는 듯 하지만 스스로 살아 움직이는 주체성은 부족해 보인다. 나의 이립은 서른이 아닌 서른 둘, 지금부터 시작이다. 능동적으로 사유하고 행동하는 한 그 어떤 시작도 결코 늦은 때란 없다. 스스로 선다는 것이 본디 독립의 의미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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