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 수업 만들자. 애들은 모였어. 시작만 하면 되. 컨셉 고민해보고 커리큘럼 짜서 작업실로 와.
그 다음주에 바로 수업 시작하자고.
개인 작업실에서 아이들과 미술 수업을 하시는 나의 학창시절 교회 성가대 선생님. 대학생-고등학생으로 맺어진 인연이 두 아이의 엄마-독립을 선언한 30대가 되는 시간까지 참 오래도 이어졌다. 한 달 전 나의 퇴사 이슈를 알고 계셨던 선생님은 내게 충분히 쉴 시간을 주셨던 것 같다. 스스로도 무기력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음을 느끼던 중 선생님으로부터 메시지를 받은 것이다. 바닥에 한 쪽 볼따귀를 대고 쫙 붙어 늘어져 있던 내 고개를 번쩍 치켜들게 만드는 제안!
머릿속에 할 일 목록은 가득했지만 좀처럼 움직일 수 없던 나는 선생님의 제안에 억지로라도 몸을 일으켜야만 했다. 읽어보라고 하신 책도 곧바로 구해 읽고, 정돈되지 않은 아이디어들도 빈 노트에 가득 적었다. 하지만 아이디어가 들어온 문으로 상상력이 풍부한 두려움과 걱정도 동시에 비집고 들어왔다.
‘내가 뭐라고 어린이들에게 글 쓰기를 가르친담?’
교회 주일 학교에서 초딩들과 놀거나 시골 공부방에서 여름 캠프를 진행한 것 외에는 교육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없다. 글쓰기라는 영역도 대상 없는 허공에 외치는 감정 토로식 한풀이 이거나 기억을 붙들기 위한 일기 쓰기 따위의 조잡한 수준일 뿐 전문적으로 배운 적도, 가르친 적도 없다. 그런데 선생님은 왜 나에게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를 맡기신 걸까. 영 자신이 없다.
풀 죽은 마음과 분주한 얼굴로 낑낑대며 수업을 준비하던 나에게 또 하나의 메시지가 왔다. 미술 작업실 학부모님들에게 보내진 선생님의 공지 링크였다. 그 중 일부 문장에 빨간펜으로 강조한 듯 시선과 마음 모두를 빼앗겼는데 일순간 내 주변이 소슬해졌다.
‘…검증된 인문학 선생님을 모시고 진지하게 진행…’
검증된, 인문학, 선생님, 진지 라는 단어 중에서 내가 동의할 수 있는 단어는 고작 한 개, 너그럽게 봐야 두 개 정도였다. ‘검증된’과 ‘인문학’은 나에게 넘사벽 같은 존재여서 이 문장을 증명해야 하는 당사자로서는 퍽 곤란해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헌데 갑자기 행복 회로라는 것이 발동된 것인지 ‘검증된’이라는 단어를 검증하기 위해 내 기억들이 총 공세를 벌이기 시작했다. 어느정도 읽어줄 만한 글을 써낼 줄 안다는 사실과 적어도 내가 쓴 글을 좋아하는 부류가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작은 시작은 초딩 때 받은 교내 글쓰기 상장이었고, 에디터 일을 했던 인턴 회사에서, 수시로 전사 공지를 작성하고 대표님과 메일로 잦은 소통을 해야 했던 첫 회사에서, 인문학을 배웠던 수업에서, 이력서에 첨부한 내 블로그 글을 전부 봤다는 인사담당자에게서, 새 음반 출시 기념 엽서에 실을 글귀를 써달라는 친구에게서, 마케팅을 담당하는 출판사 친구에게서, 그리고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잘 읽고 있다며 수줍은 응원을 보내는 소중한 지인 독자들에게서. 나는 바로 그들로부터 ‘검증된’ 사람이라는 기억 조각을 모아 셀프 검증을 한 것이다.
그들은 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던 말들, 가령 ‘글을 잘 쓰네요’ 라던가 ‘글 써보는 게 어때’ 혹은 ‘글 좀 부탁해’ 같이 구태여 덧붙인 말이 나를 쓰게 만들었고, 계속 쓰다 보니 이만큼이라도 할 줄 알게 된 것이다.
나는 어떤 공인 기관의 증을 받진 않았어도 짧지 않은 시간, 다양한 ‘실제’ 사람들로부터 인증과 격려를 받았다. 그거면 충분한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글을 쓰는 게 재미있고도 멋진 일이라는 것을 가르치는 일에는 말이다. 아이들을 대하는 마음 가짐과 진지한 태도가 훨씬 중요해진 느낌이 들었다.
사람들이 무심코 던진 말에 맞아 글을 쓰다, 이제는 가르치는 사람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나도 사람을 키우고 일으키는 말을 곧잘 던지는 사람이 되어 그 말이 혹자를 세워줄 수 있다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