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마음에 쏙 드는 데이트 장소 고르는 방법’을 알고 있다며 남자친구는 자신 있게 이야기 했다. 공간 수집에 관심이 많고 선택 기준이 까다로운 나로서는 오답일 게 분명한 그의 들뜬 발언에 어떻게 위로를 해줘야 할지를 고민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건물이 한옥이거나 나물 반찬이 겁나 많이 나오는 한식당이면 확률이 아주 높아져.”
종종 본인의 어머니와 할머니 일화를 나와 연결시키며 나를 그 분들과 동년배로 대하는 것 같은 순간에는 묘하게 얻어맞은 기분이 들기도 한다. 오답을 확신하던 자신감은 어디 가고 그의 대답 끝에 나는 패자의 가장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나와의 생존을 위해 필사적으로 그간의 데이터를 수집해 공통 키워드를 캐치해 낸 것이다. 나는 한국의 오래된 정취를 좋아한다. 보다 정확히는 한국의 정취가 아닌 오래된 것을 좋아한다.
처음부터 그 가치와 매력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도 여느 또래들처럼 패션 잡지를 구독하고 새 옷과 최신 핸드폰을 항상 필요로 했다. 같은 동네에 주구장창 사는 것이 지루했고, 노트는 4장 정도 쓰고 나면 금새 지겨워져 엄마 몰래 쓰레기 더미 안쪽에 숨기고는 낯선 표지의 것을 자주 사들였다.
대학교 3학년을 마치고 휴학을 했다. 어느 책에서 알게 된 갭이어*라는 서양 문화가 멋있어 보여 휴학 대신 갭이어 중이라고 말하고 다녔다. 나는 유럽 배낭 여행을 계획하고 스펙에 한 줄 넣을 요량으로 외국인들과 함께하는 일주일짜리 캠프도 일정에 포함시켰다. 그 캠프는 당시 취업 자소서를 위한 작은 날개짓에 불과했을 뿐, 훗날 다른 동기들과 나를 구별시킬 태풍이 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유일한 동양인으로 덴마크, 터키, 프랑스, 그리스, 스페인, 러시아 또래들과 함께 먹고, 자고, 놀았다. 그들은 익숙한 내 또래 친구들과는 완벽히 달랐다. 문학과 정치를 논하고, 집에서 만든 옷을 입고, 낡고 더러운 매트리스에 태연하게 얼굴을 파묻을 줄 알았고, 2시간도 넘게 걸리는 할머니 레시피 토마토 파스타를 만들면서도 마냥 즐거워했을 뿐더러, 3가지 로션을 층층이 얼굴에 쌓는 나에게 ‘충분히 아름다운 네 얼굴을 괴롭히지 말라’고 걱정하듯 조언했다.
일주일의 캠프 기간 동안 나와 그들을 구분 지은 것은 모국어의 차이가 아니라 시선과 선택의 차이였다. 나는 눈이 바깥을 향해 달려있는 사람이었던 반면, 그들은 각자 사랑스럽게 여기는 자기 내부 어딘가에서 꿈뻑꿈뻑 하다가 가끔씩 뭍으로 나오는 생명체와 같은 눈을 지닌 사람들 같았다. 달리 말하자면, 나는 ‘좋다고들’ 하는 것을 내가 실제로 좋아한다고 믿었고, 그들은 ‘좋아하는’ 것을 사랑의 영역으로 확장시키는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정형화 된 어떤 것도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외부의 평가가 아닌 자기 내부의 취향을 가진 자의 인생을 봐 버린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나는 주변으로부터 경계 태세를 취하고 내 눈을 바깥에서 안으로 감춰버렸다. 마음 같아서는 눈 뜬 장님처럼 살고 싶었지만 <세상에 이런 일이>에 나오고 싶어 작정한 건 아니었기에, 대한민국에서 ‘다르게’ 살기 위해 많은 용기와 잦은 각오를 먹어줘야 했다. 하지만 점차 ‘뭔가 다르다’, ‘개성 있다’라는 말이 나에게 희열을 느끼게 하면서 안심하고 또라이로 사는 노력을 계속 할 수 있었다.
내가 남들과 다르기 위해 오래된 것을 좋아하기로 선택한 건 아니다. 여행에서의 깨달음 이후 오랜 시간 꾸준히 탐구하여 찾아낸 나의 취향이다. 나는 이것이 내가 단련시킨 안목이라고 믿는다. 새로운 것이 끊임없이 생산되고 무의식 중 소비가 강요되는 시대일수록 진짜를 찾아내는 일은 귀찮고 고되다. 새로운 것도 그 나름의 매력이 있겠지만 나는 이야기를 품고 있는 것들이 나를 대신하여 설명해주는 것 같아 이야기의 역사가 길면 길수록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오랫동안 사랑받은 무언가는 앞으로의 시간을 견뎌낼 힘도 그만큼 저장해놓고 있다는 뜻이기에 나는 그 힘에 의지하기도 한다. 세상과 단절된 채 살 수는 없지만 과도하게 많은 정보가 진짜 나를 흐려 놓지 못하도록 적당히 내 안에서 뻐끔뻐끔 거리면서 살아본다.
*갭이어(Gap Year) : 영국에서 시작된 문화로, 대개 진학 전에 학업을 병행하거나 잠시 중단하고 봉사, 여행, 진로 탐색, 교육, 인턴, 창업 등의 다양한 활동을 직접 체험하고 이를 통해 향후 자신이 나아갈 방향을 설정하는 시간을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