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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Mar 02. 2022

겨울의 오해와 화해                    



 한 여름 나의 책가방 속 필수품은 기모 후드였다. 쉬는 시간이면 각종 공놀이와 몸 씨름에 땀 범벅이 되어버리는 10대 남자 아이들은 할 수 있는 한 에어컨을 최대로 가동시키고도 덥다는 말을 욕 만큼이나 많이 했다. 교실 네 귀퉁이에 번갈아 앉아 보기도 하고,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라며 에어컨 바로 아래 자리로 옮겨 주신 선생님의 배려도 있었으나 학창 시절 나의 여름은 냉방병과 늘 함께였다. 1년 내내 수족 냉증과 환절기 감기, 기관지 질환에 시달렸다. 나에게 사계절 대한민국은 12월에 시작되는 겨울과 에어컨으로 만들어진 겨울, 두 계절로 나뉠 뿐이었다.


 추위에 극도로 약하지만 겨울을 싫어했는가, 하면 꼭 그랬던 건 아니지 싶다. 여름의 더위를 에어컨으로 조작하는 건 끔찍해 했지만 겨울의 추위를 덥히는 건 미안하게도 좋았다. 오븐 속 온기와 고구마 냄새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TV 앞에는 귤과 담요가 굴러다니고, 옷장의 부피와 두께를 보는 것만으로도 따듯해졌다. 겨울은 줄곧 거리를 두었던 이에게도 사근거리게 만드는 재주가 있어 몸과 몸 사이를 가깝게 해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가장 좋아하는 계절을 묻는 질문에, 겨울이라고 답할 만한 구실이 되기엔 부족했다.


 지극히 개인적으로, 겨울은 사계절 중 가장 사랑받지 못하는 계절이 아닐까 생각한다. 겨울이 최고라고 말하는 이들에게는 미안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렇다. 자전거를 타거나 산책하기도 힘들고, 가뜩이나 움츠러든 몸이 잔뜩 껴입은 옷으로 둔해져 행동도 굼뜨게 된다. 잘 말아 놓은 앞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못 생겨지는 것도 싫고, 불어나는 몸무게에 고구마와 귤을 방패 삼는 일도 그만두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겨울이 나에게 자기 변호를 하기 시작했다. 입동을 지나 대설을 전후로 하여 얼어붙은 대기의 목소리다. 그 목소리는 6년 전으로 태엽을 되감았다. 


 다이소에서 압축팩 몇개를 사 와 보름이 넘는 여행 짐의 밀도를 높였다. 러시아 이루크츠크에서 시작해 모스크바로 향하는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는 여행이었다. 7명에 달하는 친구들이 기적처럼 시간을 맞췄다. 일주일의 동행 후 나는 혼자가 되어 모스크바에서 아이슬란드로 이동했다. 아이슬란드에서의 백일몽이 깨어진 뒤에는 미국 미네소타에서 또 일주일을 보냈다. 2016년 겨울의 나는 지구에서 가장 춥다는 지역들을 도장 깨듯 밟아 나갔다. 미네소타는 야외에 물을 뿌리면 그대로 얼어버리는 곳이었다.


 이 여정은 얼마간 내 기억 속에 잠들어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겨울  냄새와 함께 호명된 것이다. 기억이 긴 겨울잠을 자는 동안 과거의 여행 전체가 하나의 냄새로 응축된 것 같았다. 사실 그 겨울은 우습고도 아팠던 기억의 파편이기도 했는데 어느새 하나의 냄새가 되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것은 나에게 치유이기도 해서 그 때의 겨울을 닮은 오늘의 찬 공기 중으로 안도의 숨을 쉬어 냈다. 모든 기억은 결국 추억이 된다는 시간 세례의 법칙이었다.


 이제 겨울은 가장 인기 없는 계절이라는 불명예에서 벗어났다. 나는 이제 이 계절도 충분히 사랑스러운 것으로 포근히 안을 수 있게 되었다. 자전거를 못 타고 산책을 못 하게 되어도 괜찮다. 겨울은 다음 해에도 추억을 담은 공기와 함께 올 테니까. 사실 나는 처음부터 여름의 온도를 낮추는 것 보다 겨울을 덥히는 편을 좋아했었으니까. 겨울과의 오해를 풀었으니 앞으로는 응집된 겨울 냄새에 또 다른 추억의 레이어를 쌓아 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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