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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파감자 May 09. 2022

너희들의 '점'

보이글방 수업일지 06.

     마침 7주차 수업이 '어린이날' 하루 전이었다. 글방 어린이들과는 조금 특별한 어린이 날을 보내고 싶어 의미있는 수업을 계획했었다. 마을 도서관에서 무작위로 책을 꺼내 읽다가 짧은 시간, 나를 주체할 수 없는 감정으로 끌고 갔던 그림책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어린이들과 꼭 같이 읽고 싶었고, 다른 각도에서 어린이날을 보내기에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화가가 꿈인 어린이가 자신을 소개하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야기. 곧이어 키르기즈스탄, 루마니아, 레바논 등의 어린이들도 차례로 자신을 소개한다. 굶지 않기 위해 탄광에서 채굴하는 어린이, 도시의 하수구에서 홀로 살아가는 어린이, 전쟁 고아가 된 어린이 등, 글방을 다니며 자유롭게 자신의 꿈을 써내려가는 우리 어린이들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거짓말 같은 이야기, 그러나 지극한 현실. 어린이날 100주년을 맞이하여 100년 전 이 날이 왜 만들어지게 되었는지, 현 시대의 어린이들의 환경은 어떻게 달라졌는지, 타자 어린이들의 세계는 어떠한지를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하고 그들에게 편지를 쓰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다 문득, 말그대로 그냥 걷던 중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각자 책 한 권 완성을 목표로 시작했던 이 글방이 학급 문고 같은 모음글집(集)으로 방향을 전환한 배경 말이다. 그것은 교사인 나의 불신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 어린이들을 향한 불신. 그러니까 갓 초등학교에 입학한 2명의 어린이와 글은 곧잘 써내지만 솔직한 자기 글 이라기보다는 상상 속 동화만 즐겨하는 어린이는 아마 완성도 있는 책 한 권을 만들어낼 수 없을 거라는 불신 말이다. 완성도라는 것도 순전히 내 기준이면서... 나는 정말 이 어린이들을 믿지 못했나? 이런 혼란 속에서 얼마 전 읽었던 책이 생각을 비집고 들어왔다. 일전에 수업에도 쓰였던 피터 레이놀즈가 쓴 다른 그림책 <점>이 그것이다.



     <점>의 주인공 베티는 그림 그리기를 어려워하는, 그래서 싫어하는 어린이다. 마지막으로 교실에 남을 때까지 아무 것도 그려내지 못한 빈 종이. 그럼에도 능청스러운 선생님이 불만이었는지 베티는 점 하나를 내리꽂고는 이제 됐냐는 식으로 굴었다. 선생님은 골몰하는 듯 그림을 보더니 베티가 찍은 점 아래에 이름을 적어달라고 했다. 얼마 뒤 베티는 자신이 찍은 점 그림이 고풍스러운 액자에 담겨 걸린 것을 보았고, '저것보다 더 나은 점을 그릴 수 있다'며 다양한 색과 크기, 구도의 점을 그려나가기 시작한다. 그렇게 베티의 점 시리즈는 학교에 전시되고 졸지에 팬까지 생겨나게 되는데, 베티의 그림을 부럽게 쳐다보는 동생 팬에게 너도 할 수 있다며 빈 도화지에 줄을 하나 그어보라고 제안한다. 그리고 삐뚤빼뚤 미숙하게 그은 줄 아래에 '네 이름을 적으라'는 베티의 말로 이야기는 끝난다.

 <점>을 읽고 나는 큰 용기를 얻었다. 당장 수많은 점을 찍어내고 싶을 정도였다.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 그리고 그 자신감의 원천인 선생님의 능숙한 대처와 지도를 흡수하고 싶은 마음에 여러번 읽었다. 글방 어린이들을 향한 나의 불신에 이 책이 끼어든 까닭은 명백하다. 내 마음이 움직이고 영감 받았던 것과 상관없이 나는 여전히 관성대로 생각하고 결정하고 있었음을 자각했기 때문이다. 책은 무릇 나를 깨우는 도끼라고 하지 않았던가! 깨지지 않았다면 도끼날이 잘 들지 않았거나 내가 완고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유연하고 싶다. 휘날리는 도끼날에 찍혀 고통스러울지라도 부디 정면으로 맞고 싶다.

 결국 나도 어린이들의 '점'을 액자에 걸어 보기로 마음 먹었다. 비록 나는 이야기 속 선생님만큼 지혜롭지 못할지라도 나보다 깨끗한 시야와 여린 심장을 한 어린이들이 자신이 찍어낸 '점'으로 용기를 얻기 바라는 마음으로. 그래서 각자의 '점'을 찍기로.



     기왕 찍기로 한 '점', 다같이 <점>을 읽는 것으로 시작했다. 책을 쓰기 위한 첫 단계로 [기획서 작성]을 할텐데 이미 완성된 책의 개요를 역추적하면 나의 책을 기획하기 더 쉬울테니까. 책을 만들 때 필요한 요소를 제목, 등장 인물, 배경, 주제, 줄거리(시작-중간-끝)로 정하고, 세 어린이가 한 팀이 되어 정답을 찾아보기로 했다. 제시된 항목들 중 '주제'를 무어라고 할지가 가장 궁금했다. 아니나 다를까 일단 주제가 의미하는 바를 설명해주어야 했는데, 제목과 주제가 헷갈리는지 처음에는 "점!"이라고 답했다. 책이 하고싶은 이야기를 한 줄로 말하는 것이 주제라고 알려주자 "점으로 그림 그리는 이야기", "용기를 주는 이야기"라는 의견이 나왔다. 나도 이 책의 주제를 한 문장으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지 고민했는데 '용기를 주는 이야기'라는 주제가 제격인 것 같았다. 이 어린이는 벌써 용기를 얻었나보다. 작가의 의도가 정확하게 맞아떨어지는 순간. 용기를 얻은 이 어린이가 써내는 이야기는 어떨까, 몹시 궁금해진다.

     <점>의 기획서를 적어본 후 본격적으로 각자가 써낼 이야기로 옮겨왔다. 너희들이 이 기획서에 적은 내용을 토대로 4주 후에는 각자의 책이 완성될 거라고 짐짓 비장한 눈빛으로 말했더니, 뒤늦게 합류해 오늘로서 세 번째 수업을 하는 어벤져스가 "진짜 이런 책 만드는거에요? 와- 나 평생 꿈인데!"라며, 수업 내내 딴지를 걸던 모습은 기억해낼 수 없을 정도로 빛나는 얼굴을 보여주었다. 간절히 바라던 꿈이 이뤄지는 순간을 목전에 둔 사람의 얼굴이었다. 어린이들에게 그저 '점' 이기만 했으면 좋겠다던 나의 바람은 이 어린이들에게 가서 '꿈'이라는 거창한 단어가 된 듯 했다.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어주는 일이 마치 나에게도 내내 기다려왔던 꿈처럼 간질거리는 부담감이 되었다. 나는 세 어린이의 진지한 정수리 사이를 숨죽여 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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