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글방 수업일지 07.
우리는 그림책을 만든다. 많은 부분을 그림으로 설명하고 설득시킨다. 주제(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분명하고, 맑은 메시지(어린이다운)를 전하고, 게다가 어른이 쓴 책과 차별된 창의성과 순수함을 담은 이야기를 써낼 것이라고 혹여 기대할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처음에는 어린이들이 그런 글을 쓰게 해주고 싶었다. 그럼에도 어린이들이 끝내 들려준 이야기는 '(진심으로) 이 이야기를 책으로 쓰고 싶다는거지?', '이야기가 (정말) 이렇게 끝나는거니? (확실해?)' 싶을 정도의 황당하고 허망한 내용이었다. 여덟 살 두 남자아이는 각각 팀 어벤져스와 공룡, 외계생명체, 마인크래프트가 서로 싸우고 죽이는 이야기를 사이좋게 썼다. 사실 이 어린이들은 글방에 처음 왔을 때부터 책의 내용을 정한 상태였다. 이들에게는 각각의 세계관을 영상으로 마주한 후부터 각자의 마음 속에 침투한 격렬한 캐릭터들과 스토리를 책에 붙잡아두고 싶었던 것 같다. 실제 그들이 사는 세계에서는 하늘을 날아다닐 수도, 공룡과 외계 생명체를 만날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고 인상깊은 이야기를 쓰게 마련이니까. 이 어린이들의 선택은 거절보다는 수용되어야 하는 부분이다. 어린이들을 글 쓰는 사람으로 자라게 하자면, 먼저 쓰고 싶은 것을 마음껏 쓰게 해야 한다. 그래서 이 책은 더더욱 이들의 '점'이 될 것이다. (이전 글 참고)
지난 시간에 만든 책의 개요를 바탕으로 페이지를 구성하며 수업을 시작했다. 미리 타이핑, 출력 후 오려 온 스토리 라인을 각자의 페이지 보드에 나열해서 책에 실제로 들어갈 문장을 적는 순서였다. 어린이들은 내가 건네준 조각 조각의 스토리 라인을 순서대로 진열하고는 곧바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내 딴에는 시놉시스 정도라고 여겨 실제 문장은 새로 써야한다고 생각했던 것인데, 어린이들에게는 스토리 라인이 아니라 페이지에 넣을 글이었나보다. 어쩌면 크고 두꺼운 도화지를 내려다보고 흥분한 나머지 한시라도 빨리 그림이 그리고 싶어졌을 뿐이었을지도. 어쨋든. 어린이들의 즉흥성에 따라 준비해 온 순서를 건너뛴 게 한두번이 아닌지라 이번에도 역시 어린이들이 하고 싶은 바를 존중했다. 아니 오히려, 더 두껍고 큰 도화지를 여러장 가져와 싸인펜과 색연필, 크레파스를 마련해주며 어린 작가들의 처녀작이 탄생하는 첫 순간을 응원했다.
어린이들은 다 제각각이다. 인물 한 명 한 명 드로잉 하자마자 꼼꼼히 채색하는 어린이가 있는 반면, 페이지에 들어가는 모든 윤곽을 다 그린 후 채색하는 아이도 있다. '말풍선 따위는 필요없다. 난 그림으로 모든 걸 설명하겠다' 하는 아이가 있다면, 그림을 그리면서 일일이 말로 장면을 설명하느라 선이 페이지의 장과 장을 넘나드는 리얼타임형 아이도 있다.
50분이라는 시간은 이 어린이들에게 짧기도 길기도 한 시간이다. 초등학교 저학년 어린이들이 한가지에 오롯이 집중하기에 50분은 가혹하다. 억겁같은 시간. 그러다가 또 마음껏 자유롭고 즐기는 대상 앞에서는 어른의 체력과 정신력을 혼비케 만들 정도로 에너지가 줄어들 줄 모른다. 열 살 구름이에게 책 만드는 일, 특히 그림 그리는 행위가 딱 그렇다. 미술 학원을 두 군데나 다닐 정도로 그림을 좋아하는 구름이마저도 매 페이지마다 등장하는 주인공을 반복해서 그리느라 중간 중간 손목을 털어주었다. 그림만 계속 그리느라 손목이 힘들겠다며 그 노고를 칭찬하면 '손목 아파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저 원래 이렇게 손목 털어요.'라고 대수롭지 않다는 듯 으스댔다.
스토리 보드의 여덟 페이지에 제일 먼저 그림을 채운 크리퍼는 다른 친구들의 그것처럼 채색을 권하자 포스트잇에 '피곤해'라 적고 이마 정 가운데에 붙이는 퍼포먼스로 조용한 농성을 벌였다. 그래 그래. 피곤하지, 피곤하고말고. 그래도 정해진 페이지는 모두 채운 크리퍼에게 이야기가 끝난거냐고 묻자 아직 00과 XX가 싸우지 않았다고 답했다.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온 300페이지 짜리 책을 꺼내, 자신은 이만큼 두꺼운 책을 쓸거라고 했는데,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가됐든 네가 하고싶은 이야기라면 마음껏 쓰자. 그러고나서 차근히 하나하나 짚어가자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