꼬여버린 시작, 라면으로 후루룩

꿈꾸던 유럽의 첫 날은,

by 지소


32kg과 23kg의 대형 캐리어 2개, 23kg의 중형 캐리어 1개와 아마도 10kg이 조금 넘는 소형 캐리어 1개, 사면이 모두 빵빵해진 책가방 2개, 크로스백, 그리고 빔 프로젝터와 여러 장비가 든 카메라 가방까지. 도합 100kg의 짐과 함께 우리 부부는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떨어졌다. 현지 시각은 오후 2시,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잿빛 세상. 얼마가 될 지 모르지만 이제 우리가 살게 될 이 나라에.



떨리는 마음으로 입국 심사를 기다렸다. 2022년 1월은 아직 펜데믹의 시대였다. 독일은 영문백신접종증명서만 있으면 입국을 허가해주던 시기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운이 나쁘면 입국이 거절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심호흡을 하고 입국심사관에게 다가갔다. 그는 입국 목적을 물었고, 워킹 홀리데이로 왔다고 대답했다. 머무를 숙소 증명서를 보여 달라는 예상치 못한 말에 사고 회로를 홱홱 돌려 핸드폰에 혹시 몰라 저장해두었던 에어비앤비 예약 확인서를 찾아 냈다. 확인이 끝나자 입국심사관은 좋은 시간 보내라는 인사로 나를 보내주었다. 한국에서 같은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받은 남편 산도 무사히 입국 심사를 끝냈다.






이제 독일에 입국한 자유인이 된 우리는 온 몸에 짐을 장착하고 S-Bahn(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교외 전철)을 탔다. 마인츠의 에어비앤비 숙소가 우리의 첫 보금자리였다. 집을 구하는 데 얼마나 걸릴 지 몰라 일단 한달을 예약해 두었다. 연일 코로나 확진자 최고치를 경신하던 시기, 전철 안 사람들과 창 밖 풍경은 모두 조용했다. 독일어로 들리는 안내 방송과 끝없이 펼쳐지는 자연이 내가 독일에 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내가 정말 독일에 왔구나. 드디어 회사를 때려치고 내가 정말 독일에 있구나.



잠깐 감상에 젖었다가 마인츠 중앙역에 도착해 정신을 차렸다. 잠깐 와이파이를 연결해 숙소까지의 경로를 찾고 밖으로 나왔다. 숙소까지는 걸어서 10분. 예약할 때는 아주 가까운 거리라고 생각했는데 우리에겐 100kg의 짐이 있었다. 작은 사각형 보도블록으로 이루어진 유럽의 길에서 캐리어는 덜컹덜컹, 요란한 소리를 냈고 너무 짐을 꽉꽉 담은 탓에 바퀴도 잘 굴러가지 않았다. 12시간의 비행으로 다리는 퉁퉁 붓고 몸에는 힘이 하나도 없었다. 몸뚱이와 짐을 질질 끌면서 겨우 발을 움직였고 다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 무렵, 우리는 숙소에 도착했다.




방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좋았다.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 신축 아파트였고, 분리된 침실 하나와 거실 겸 주방이 있었다. 빌트인 오븐과 식기세척기까지. 독일에는 오래된 집만 있을 거라는 생각과는 달리 한국의 신축 오피스텔 못지 않은 집이었다. 식탁에는 우리를 위한 크로아상과 다채로운 색이 칠해진 달걀, 요거트와 바나나 등이 놓여 있었다. 꿈꾸던 유럽 생활의 시작이 눈 앞에 있었다. 빵과 따뜻한 차, 과일, 치즈로 하루를 시작하는 낭만적인 유러피언의 삶. 오븐으로 그라탕이나 라자냐, 직접 구운 쿠키를 만들어 먹는 여유로운 삶.




가볍게 짐을 풀고 가족들에게 연락하기 위해 와이파이 연결을 하려고 했다. 집을 둘러보는데 와이파이 공유기가 보이지 않았다. 에어비앤비 호스트 대신 체크인을 도와줬던 한국인 어시트턴트에게 와이파이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 문자 메시지를 보내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충격적이었다.


와이파이는 아마 안 되는 걸로 알고 있어요…ㅠ


와이파이가 안 된다고..? 요즘 세상에 와이파이가 안 되는 에어비앤비가 어딨어? 충격에 휩싸였다. 분명 숙소를 예약할 때 와이파이 사용 여부를 확인했기에 우리는 독일에서 사용 가능한 유심을 준비하지 않았다. 한국 번호를 유지할 생각으로 로밍이 가능한 알뜰폰 요금제를 개통해왔고, 독일에서 e-sim 사용이 가능한 통신사로 새로 독일 번호를 개통할 계획이었다. 그러려면 당연히 인터넷이 필요했다. 잘 도착했다는 연락도 해야 하고, 인터넷 강의로 독일어 공부도 해야 하고, 집도 알아봐야 하는데. 영화 보려고 빔 프로젝터까지 챙겨 왔는데... 인터넷이 안 되면 당장 해야 하는 일을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일단 숙소 근처의 근처의 슈퍼에 가서 저녁거리와 세면용품, O2 통신사의 선불 유심을 샀다. 새로 산 유심을 핸드폰에 연결했지만 전혀 작동하지 않았다. 패키지를 살펴보니 개통을 위해서는 URL로 접속해 등록을 해야 한다고 적혀 있었다. 아니, 인터넷이 안 돼서 인터넷을 하려고 유심을 샀는데, 유심을 개통하려면 인터넷이 필요하다고?


당장 급한 마음에 요금을 감수하고 결국 한국 통신사의 로밍 데이터를 이용해 선불 유심 개통을 시도했지만 개통을 위해서는 신원 확인을 위한 화상 통화를 해야 했다. 외국인과 화상 통화라니, 내가 할 수 있을까? 그래도 어쩌겠나, 해야지. 긴장하며 '연결하기' 버튼을 눌렀다. 그런데 연결이 안 된다. 한참을 기다렸는데 계속 인터넷 연결이 좋지 않아서 통화 연결이 불가능하다는 안내가 떴다. 기존에 입력했던 정보도 초기화가 되어서 다시 입력해야 했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였다. 겨우 연결이 되어도 통화가 불가능한 탓에 상대가 통화를 종료했다. 로밍 데이터는... 정말 느렸다.


통신사 대리점에 갈까 했지만 문을 닫은 시간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스타벅스에 가면 와이파이를 쓸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당시 독일 대부분의 실내 시설 이용을 위해서는 백신 접종 증명 QR 코드가 필요했다. QR 코드 인증을 위한 앱을 설치하려고 시도했지만 고맙고도 소용없는 인터넷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


몇 시간을 씨름한 끝에 모든 걸 포기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침대에 누웠다. 난 그냥 숙소에 와서 편안하게 쉬고 싶었을 뿐인데. 로밍 데이터 요금을 감수한 보람도 없고. 이 곳에 머무는 한 달 동안 인터넷을 사용할 수가 없다면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매일 까페에 가는 것도, 선불 유심 데이터를 충전하는 것도 추가 비용이 드는 일이었다. 저축으로 생활해야 하는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부담스러웠다. 숙소에 인터넷만 되면 모든 것이 해결되는데, 호스트는 도통 연락이 되지 않았다.


꿈꾸던 독일에 왔는데, 왜 벌써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까. 어떤 현실이 우리 앞을 닥칠지 모르지만 그래도 한동안은 편안하고 싶었는데. 장밋빛 꿈이 오늘의 날씨처럼 잿빛 현실로 펼쳐질 것 같은 마음에 불안이 덮쳐왔다.




pj3UwILOsqSTcZ1WV5lNEaUn-84.jpeg

독일의 긴 겨울 밤을 뜬 눈으로 지새고 날이 밝자 마자 마인츠 중앙역으로 향했다. 그곳에 가장 가까운 스타벅스가 있었다. 커피를 주문하고 와이파이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데 역시나, 입장을 위해서는 백신 패스가 필요했다. 한국에서 출력해 온 백신 영문접종증명서가 있었지만 독일에 온 지 하루 밖에 안 된 이방인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일을 최대한 피하고 싶었다.


다행히 핸드폰을 켜보니 독일철도에서 제공하는 무료 와이파이를 중앙역에서 사용할 수 있었다. 역사 안 벤치에 자리를 잡고 어제 슈퍼에서 산 선불 유심의 개통 사이트에 접속했다. 중앙역 와이파이는 아주 빵빵 터졌다. 와, 속이 너무너무 시원했다.


유심 개통을 위한 영상통화는 독일어로 진행되었다. 아주 어려운 표현들이 나오지 않아서 요구사항을 잘 수행했다. 신원과 신분증을 꼼꼼히 대조하는 작업이었다. 여권 내부를 보여주고, 담당 직원이 내 얼굴과 이름이 맞는지 확인했다. 드디어 유심 개통에 성공하고 독일 전화번호를 받았다. 무선 인터넷도 쓸 수 있었다. 독일어로 무언가 해낸 첫 성취였다.


이어서 중앙역의 시원한 와이파이로 당장 필요한 모든 일을 수행했다. 가까운 약국에 들러 영문백신접종증명서를 제출하고 QR 코드도 발급받았다. 앱에서 QR 코드를 인식하니 자동으로 접종 내역과 인증을 위한 QR 코드가 앱에 저장되었다. 이제 이것만 있으면 어느 곳이든 갈 수 있다!




집으로 오는 길에 아시안 슈퍼마켓을 발견했다. 그 곳에는 간장, 참기름, 된장, 고추장 등 한국 음식에 필요한 모든 것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게다가 종류별로 다양한 한국 라면까지. 마음이 든든해졌다.


"이제 독일 핸드폰 번호도 있고, 인터넷도 되고, 아시안 슈퍼마켓만 있으면 음식 걱정도 전혀 할 필요가 없어. 여기서 정말 잘 살 수 있을 것 같아. 그렇지?"


산과 나는 금세 신이 나서 라면, 김자반, 쌀과 카레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R0006788.JPG
R0006790.JPG


익숙한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지고 침이 고였다. 라면은 보글보글 끓고 한국에서 가져온 압력 밥솥에서 취- 소리와 함께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국물을 한 숟가락 먼저 떠 먹었다. 짜고 매콤한 라면의 맛. 온 몸이 따뜻해졌다. 뜨거운 면발을 후후 불어 입 속으로 가득 당겼다. 꼬들꼬들해. 적당히 잘 익었다. 매끈한 쌀밥에 국물을 가득 적셔 또 한입. 반숙으로 익은 달걀도 한입.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해결했어. 라고 라면이 말해주는 것 같았다. 그래, 앞으로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 얼큰한 국물만 있다면, 이 꼬들꼬들한 라면과 밥과 달걀만 있다면 우리는 괜찮을 거라고. 우리는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라면을 사이에 두고 "너무 맛있다, 진짜 행복해."를 연발하며 마주 보고 웃는 우리였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