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생한 후 먹는 한국 치킨과 독일 맥주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빠져버린 인터넷 카오스에서 우리는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당연할 거라고 믿었던 숙소 와이파이 사용은 불가능했고, 우여곡절 끝에 성공한 선불유심 개통 후 모든 문제가 해결된 줄 알았지만 고작 1-2시간 후 간단한 웹서핑 조차 불가능할 정도로 데이터 속도가 느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다 된 줄 알았는데, 다시 제자리였다.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동영상을 본 것도 아니고 서핑 조금 했을 뿐인데, 분명히 내가 구매한 선불 유심의 데이터는 6.5GB인데!!!
화가 나서 핸드폰을 던져버리고 침대에 누웠다. 잠깐 통신망이 좋지 않나 보다, 자고 일어나면 다시 빨라지겠지…….
자고 일어나도 그대로였다. 유심 패키지를 뒤져 봤다. Highspeed Volume을 다 쓰면 32Kbit/s로 인터넷을 이용할 수 있다고 쓰여 있었다. 체감상 최대 50MB 사용 이후에 느려지는 것 같은데, Highspeed Volume은 대체 얼마나 적은 거지…? 사기인가? 이렇게 느린 속도로 6.5GB를 사용하라고...?
결국 다음 날 아침에 와이파이를 쓰기 위해 또다시 마인츠 중앙역으로 갔다. 가는 길에 핸드폰을 껐다 켜니 문자 메시지가 한가득 쏟아졌다. O2 통신사에서 온 메시지였다. 인터넷을 연결했으니, 하루에 0.99€로 30MB의 모바일 데이터를 쓸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독일 계좌 개설 후 e-sim이 가능한 통신사로 계약할 예정이었지만 예상치 못한 상황 때문에 급하게 선불 유심을 구매해서 1개의 번호만 개통했다. 그래서 전날 남편 산의 핸드폰에 핫스팟을 연결해줬었는데, 이 '인터넷을 연결했다'는 의미를 우리는 "핫스팟 연결을 인식한 통신사가 데이터 속도를 제한했나 보다!" 하고 생각했다. 그러니 오늘은 핫스팟 연결 없이 내 핸드폰으로만 데이터를 써 보기로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드럭 스토어에 들러 필요한 생필품을 고르면서 몇 가지 상품을 검색하다 보니 인터넷이 다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정말 화딱지가 났다. 이런 유심으로는 뭘 할 수가 없었다. O2는 나름 유명한 통신사인데 이런 말도 안되는 상품을 파는 건가? 독일은 원래 이런가? 한국에서 그냥 미리 유심을 사 왔어야 하는데. 아니다. 숙소에 와이파이만 됐어도 이런 고생은 안 했을 거다. 숙소에 와이파이만 됐어도 바로 계좌 개설을 완료하고 원래 계획했던 e-sim 사용이 가능한 후불 통신사로 계약을 했을 거다. 이게 다 와이파이 때문이었다.
답답한 상태로 다시 또 와이파이라고는 없는 숙소로 돌아왔다. 밥을 먹으며 별 생각 없이 식탁에 나뒹굴던 슈퍼마켓 영수증을 집어 들었다. 독일에 온 첫 날, 유심을 구매했던 그 날의 영수증이었다. 내역을 찬찬히 살펴보는데 유심 비용이었던 14.99€가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큰 금액은 영수증에 찍혀 있지 않았다. 대체 무슨 일이지? 대혼돈. 슈퍼에서 결제를 이미 한 게 아니라, 개통 후에 결제를 해야 하는 것이었나? 돈도 안 내고 왜 안 되냐고 화를 내고 있던 건가? O2에서 온 문자를 다시 살펴봤다. 개통 직후에 온 문자에 O2 앱을 설치해서 뭘 하라는 내용이 있었다. 개통만 하면 자동으로 6.5GB를 쓸 수 있는 상품인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라 앱에서 추가 과정이 필요했던 거였다.
다시 또 중앙역에 갔다. 대체 몇 번을 오는 건지. 와이파이 도둑이 따로 없었다. 오후의 중앙역은 아침과 다른 분위기였다. 아침에는 사람도 많지 않고 한적했는데, 오후가 되자 눈빛이 이상한 사람이 늘어났다. 혹시 모를 위험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 사람이 없는 구석으로 가 서 있는 채로 O2 통신사 앱을 설치하고 로그인을 했다. 나의 Guthaben이라는 것이 13.02€ 있다는 화면이 떴다. 13.02€를 결제 해야 하는 줄 알고 계좌 정보를 입력했는데 결제가 되지 않았다. 사전에 Guthaben을 검색했더니 '보증금, 예치금' 이라는 뜻이었다. 요금제 상품을 선택하는 항목에서 내가 구매한(구매 했다고 생각했던) 6.5GB에 14.99€인 상품을 선택했더니 Guthaben이 모자라다고 선택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순식간에 이해된 상황.
개통 후에 바로 앱을 설치해서 6.5GB 상품을 선택한 후 데이터를 사용 했어야 하는데, 아무 것도 선택하지 않은 상황에서 데이터를 쓰기 시작해서 하루에 0.99€로 30MB를 사용할 수 있는 상품이 자동으로 이틀 동안 결제 되었던 거다. 그래서 매번 30MB를 쓸 수 있는 아침에만 인터넷이 빠르고, 이후에 바로 느려졌던 것이다. 예치금은 원래 있어야 하는 14.99€에서 0.99€가 두 번 빠져서 13.02€ 밖에 남지 않은 것이고. 근데 왜 나는 14.99€를 결제하지 않았는데 Guthaben을 갖고 있는 걸까? 가입자 유치를 위해서 처음에 예치금을 가입 선물로 주나보다! (사실 이것도 아니었다.)
문자 메시지를 제대로 보지 않은 탓에 약 2유로를 손해봤지만, 어차피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이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쩔 수 없이 3.5GB에 9.99€인 상품을 선택했다. 와이파이 연결을 해제하니 그제서야 원활한 모바일 데이터 사용이 가능했다. 드디어, 3일 만의 선불 유심 사용 정상화에 성공했다. 고생 끝에!
꽉 막혀 있던 마음이 드디어 뻥 뚫렸다. 집으로 돌아와 우리 나라의 카카오뱅크와 같은 인터넷 은행인 N26 계좌 개설을 위해 영상 통화 연결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인터넷이 느려지지 않고 무사히 연결이 되었다. 계좌 개설이라 그런지 유심 개통 때보다 훨씬 꼼꼼하게 신원을 확인했다. 자신의 명의가 맞는지, 타인이 계좌 개설을 의뢰하진 않았는지 등을 질문하고 여권도 위조가 아닌지 위 아래로 기울여 홀로그램을 확인했다. 꽤 오랜 확인을 거쳐 통화 종료. 신용카드로 일정 금액을 계좌로 송금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독일 계좌 개설도 완료되었다.
우리의 중앙역 행은 이렇게 평화롭게 마무리 되는 줄 알았으나, 모바일 핫스팟으로 노트북을 연결하자마자 1GB가 사라져버린 데이터 실종 사건 이후로 중앙역 와이파이 도둑질은 한참동안 계속 되었다. 매일 아침 우리는 중앙역으로 출근해 인터넷이 필요한 모든 업무를 봤다. 업무가 끝난 후에는 퇴근 후 집에서 볼 영화나 드라마, 유튜브 콘텐츠, 독일어 공부를 위한 음원 등을 오프라인으로 재생할 수 있게 저장했다. 모바일 데이터로는 그 많은 용량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렇게 인터넷에 의존적인 인생이라니, 한국에서 어디서나 당연하게 인터넷을 쓸 수 있을 때는 알 수 없던 깨달음이었다. 전세계 인터넷이 어떤 공격에 의해서 먹통이 된다면 세상은 분명 상상도 못한 어려움을 겪겠지.
독일에 도착하자마자 맞닥뜨린 인터넷 풍파가 어느정도 잦아들 때에, 우리는 허한 몸과 마음에 원기를 보충해야 했다. 그리고 아직 독일에 와서 맥주를 한 번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맥주를 생각하니 자동으로 떠오르는 치킨. 치맥이 간절했다. 스트레스엔 역시 치맥이지. 지금 치맥보다 더 어울리는 음식은 없었다.
이 곳에 도착하기 전부터 점 찍어두었던 마인츠의 한국 치킨집이 있었다. 둘 다 회사도 일도 모두 그만두고 와서 저축으로 살아야 하기에 그동안 슈퍼에서 재료를 사서 항상 간단하게 해 먹었지만 인터넷과의 전쟁에서 장렬히 싸워 이긴 지금은 보상이 필요했다. 아침 일찍 중앙역에 와서 수십 개의 동영상을 저장한 후, 우리는 치킨집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 그곳은 코로나 영향으로 매장 내 식사는 불가능하고 포장 주문만 할 수 있었다.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앳된 아르바이트생이 한국어로 인사를 건넸는데, 한국을 떠난 지 고작 며칠 되지 않았는데도 너무 반가웠다. 독일어로 긴장하며 더듬거리지 않고 한국어로 주문을 할 수 있다는 일이 정말 신났다. 고민하지 않고 자동으로 나오는 모국어가 이렇게 간편하고 소중한 것이었다니.
슈퍼에 들러 한 병에 1유로도 하지 않는 독일 맥주를 손에 들고 힘차게 걸어왔다. 추운 날씨에 식은 치킨을 다시 오븐에 데웠다. 눈 앞에 놓인 한국 치킨과 독일 맥주. 두 조합에 마음이 설렜다. 기름지고 바삭한 닭껍질을 베어물고 경쾌한 소리가 나도록 맥주병을 서로 부딪쳤다. 부드러운 목넘김의 맥주와 입천장이 까질 정도로 바삭한 치킨이 번갈아가며 입 안으로 들어와 차곡차곡 쌓였다. 산에게는 2년의 금주 후에 처음 먹는 맥주였다. 여러 의미로 보상의 만찬이었다.
독일 맥주와 한국 치킨으로 먹는 치맥. 앞으로 우리가 살아갈 나날 같은 음식이었다. 사실은 독일 맥주 사이에 놓인 한국 맥주 같은 존재가 될 지도 모르지만, 독일 맥주와 소시지 사이에 한 번쯤은 껴서 '이 조합이 굉장하답니다.' 하고 사람들에게 슥 밀어 넣을 수 있는, 이 낯선 사회에서 흔하고도 특별한 존재로 녹아들 수 있을까.
추위에 떨다 먹은 치맥에 알딸딸하고 노곤해져서 눈이 풀린 채로 대화를 나누다 우리는 곧 단잠에 빠졌다.
이제야 프로세스를 이해했다고 믿었던 독일 선불 유심 카드의 정확한 비밀은 그로부터 한참 후에야 풀렸다. 가입할 때 예치금을 무료로 준다면 산의 독일 핸드폰 번호도 일단 선불 유심으로 구매하는 게 이득이겠다며 몇 주 후 슈퍼에 가서 호기롭게 두 개의 선불 유심을 카운터에 올려 두었는데, 유심의 가격이 내가 지불해야 하는 가격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한껏 당황해 유심을 사지 않겠다고 말하고 같이 올려 두었던 주스 값만 계산했다. 처음에 계산되지 않은 내 유심은 카운터 직원의 실수로 바코드가 태그 되지 않은 것이었다… 우연히 공짜로 쓰게 된 나의 선불 유심…
이 글을 보는 분들이 나와 같은 실수를 하지 않길 바라는 마음으로 정리하는 독일 선불 유심 사용 프로세스는 다음과 같다. (O2 통신사 기준, 다른 통신사는 다를 수 있음)
- 슈퍼에서 선불 유심 카드를 구매한다. (카운터에서 금액 결제)
- 와이파이가 가능한 숙소에서 통신사 사이트에 접속해 개인 정보를 입력하고, 신원 확인을 위한 영상통화를 진행한다. (숙소가 아니더라도 공공장소가 아닌 곳에서 진행해야 한다.)
- 번호 개통이 완료되면 O2 앱을 설치해 원하는 요금제를 선택 한다. (요금제를 선택하지 않으면 하루에 0.99€가 차감되고, 30MB 사용 이후에는 쓸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느려진다.)
- 충전한 데이터를 다 사용하면 앱에서 신용카드나 계좌이체를 통해서, 또는 가까운 O2 대리점에서 Guthaben(예치금)을 충전한다.
이게 다 모두 귀찮다면 사실 대리점으로 바로 가는 것이 가장 빠르고 간편하다. 통신사 대리점에서는 대부분 영어로 원활한 소통이 가능하다. 여권만 가져 가면 아마 알아서 다 해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입독 초기 외국인과의 대화를 최대한 피하려다 낭패를 본 케이스라고 해 두겠다. 해외 생활엔 역시 용기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