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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Nov 25. 2022

감자 5kg를 포기하더라도 그릭요거트는 먹고 싶어

화폐 단위가 되어버린 감자


낭만적인 유럽의 풍경을 즐기며 여행하듯 산책하는 삶을 시작할 거라는 기대는 독일의 악명높은 겨울 날씨에 금방 무너져버렸다. 아침 8시가 되어야 겨우 해가 뜨고 오후 5시면 금세 온 세상이 깜깜해졌는데 그 마저도 내내 비가 와서 단어 그대로의 해를 보기는 어려웠다. 가끔 창 밖으로 맑은 하늘을 발견하고 서둘러 옷을 챙겨 입은 후 거리로 나가면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은 다시 회색 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기온은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지만 매서운 바람에 추웠고, 해가 지고 나면 아직은 낯선 도시에 대한 막연한 공포감에 해코지라도 당할까 싶어 더더욱 집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우중충한 겨울의 마인츠에서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갈 곳 없는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숙소에서 보내야 했지만 그 곳엔 인터넷이 없었다. 덕분에 아침이면 마인츠 중앙역으로 가서 한 두 시간을 앉아 있다 오는 것이 우리의 일과였다. 종종 노트북을 가져 가 필요한 일을 하고 무료 와이파이를 이용해 동영상, 영화, 독일어 듣기 파일 등을 스마트폰이나 태블릿 PC에 오프라인 다운로드로 저장한 뒤 돌아오면 마음이 든든했다. 






와이파이 도둑질 외에 유일하다고 할 수 있었던 외부 활동은 식재료를 사는 일이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으니 자연스레 삼시 세 끼를 챙겨 먹는 일에 열정을 쏟았다. 독일의 높은 외식 물가로 인해 한국에서는 흔했던, 손가락 하나 까딱하면 초인종 소리와 함께 눈 앞에 음식이 놓이는 진풍경은 먼 일이 되었다. 


독일에 도착해서 처음 슈퍼에서 장을 보던 날, 우리는 한국보다 훨씬 저렴한 독일의 장바구니 물가를 직접 눈으로 확인했다. 채소와 과일, 육류, 달걀 등 대부분의 식재료가 한국의 대형마트와 비교해 최소 절반의 가격이었다. 


그 중에서도 독일인의 주식인 감자 가격은 가히 충격적이었는데, 마침 슈퍼에서 할인을 하는 날이었고 감자 3kg이 고작 1유로였다. 당시 환율로 1,350원.


아시아 마트에서 구매했던 쌀 1kg은 3유로가 넘었는데 감자를 1kg으로 계산하면 500원도 안 되는 가격이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주구장창 감자를 먹기 시작했다. 어차피 몸에 들어가면 같은 탄수화물인데 뭐, 독일인은 감자가 주식인데, 독일에 왔으면 독일인처럼 먹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독일 음식은 할 줄 모르니까 거의 한식이긴 했지만.


하필 또 1유로였던 탓에 감자는 우리의 새로운 화폐 단위가 되었다. 우리의 뇌에는 1유로 = 감자 3kg 라는 공식이 성립해버렸고 모든 물건의 가치를 따질 때 감자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이건 뭐 선사시대 물물교환 하던 시절도 아니고. 과연 이 물건은 막대한 양의 감자와 교환하기에 가치가 있는가?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주말인데 까페에 커피 한 잔 하러 갈까?"

"커피 한 잔이면 감자가 10kg인데?"



"이 화장품 좋다는데 5유로 밖에 안 해. 하나 살까?"

"5유로면 감자가 얼만지 알아? 그걸로 한 달은 먹을 수 있어!"



"치킨 먹고 싶어."

"치킨 한 마리면 감자가… 대체 얼마야."



감자와 함께 소비 생활이 퍽퍽해졌다.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우리의 아침 식탁에는 언제나 그릭요거트가 올랐다. 우유와 발효 요구르트를 이용해 간단한 요거트 메이커로 부지런히 만들어 먹어 왔는데 부피가 큰 요거트 메이커를 독일까지 가져올 수는 없었다. 그리스와 멀지 않은 독일이니 훨씬 다양한 종류의 그릭요거트를 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단단한 그릭요거트를 찾기가 힘들었다. 'griechischer Joghurt'라고 적힌 상품은 보통의 묽은 요거트와 크게 다르지 않았고 내가 원하는 유청이 빠진, 꾸덕한 요거트가 아니었다.


한국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독일 그릭요거트'라고 검색하니 역시나, 그릭요거트를 사랑하는 독일 생활 선배들의 정보가 가득했다. 일단 독일에는 '우리'가 원하는 크림치즈 같은 질감의 요거트를 찾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렇지만 우리가 누군가? 우리는 음식에 진심인 민족이다. 한국인은 언제나 방법을 찾는다. 선배들은 독일에 흔한 커피필터, 여과지를 사용해 유청을 걸러서 그릭요거트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마침 숙소에 커피필터가 있었고, 작은 유리병도 찾아냈다. 바로 그릭요거트 만들기에 돌입했다. 유리병에 커피필터를 걸치고 요거트를 조심스레 넣었다. 그리고 아래에 유청이 빠질 공간을 남겨두고 커피필터를 위로 잡아당긴 채 뚜껑을 닫아 고정했다. 바로 유청이 한 방울씩 똑똑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 날이 오길 기다렸다. 






두근두근. 다음 날 유리병을 냉장고에서 꺼냈을 때 꽤 많은 유청이 유리병 바닥에 고여 있었다. 조심스레 커피필터와 함께 요거트를 들어올려 접시에 담고 그래놀라를 토핑으로 올렸다. 유청이 빠진 요거트는 작고 소중했다. 산과 함께 각자 한 스푼 씩 입에 넣었다. 밀도가 높아진 그릭요거트가 부드럽고 진하게 혀를 감쌌다. 달콤한 그래놀라가 바삭한 식감을 더했다. 만족스러운 맛이었다. 




24시간을 기다려 얻은 그릭요거트는 고작 둘이 합쳐 3-4입 만에 끝이 났다. 당장 슈퍼에 갔다. 마치 페인트통을 연상시키는 대용량 1kg의 요거트가 있었고 약 1.70유로였다. 더 큰 용기를 위해 유리병에 담긴 피클도 구매했다. 그렇게 우리집 그릭요거트 공장에는 두 개의 유리병을 가동시키는 효과적인 생산 시스템이 자리 잡았다.








페인트통 요거트는 실로 거대했지만, 유청을 빼고 남은 그릭요거트는 부피가 절반 이상 줄어들었고 1키로 요거트 하나로 만든 그릭요거트는 고작 3번 정도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 그 가격은 감자 5kg으로 환산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고민이 시작되었다.

3번의 그릭요거트와 감자 5kg. 과연 등가 교환 가치가 성립하는가? 



찬성 의견 :

1.     우선 맛의 만족도가 높다. 우중충한 우리의 독일 생활에 한 줄기 빛이 된다.

2.     하루에 한번만 먹으니 3일의 아침 식사라고 따지면 나쁘지 않다.

3.     한국에서 만들어 먹을 때보다 더 저렴하다.

4.     단백질이 풍부하다. 감자만으로는 영양소를 채울 수 없다.


이렇게 감자 5kg과 그릭요거트의 거래가 성사되었다. 반대 의견으로는 산이 제기한 ‘원제품을 그대로 먹으면 안 돼?.’가 있었지만 묵살되었다. 맛이 다르니까.


그릭요거트의 꾸덕함은 다다익선이다. 그것은 나에게 감자를 일부 포기하더라도 반드시 지켜내야만 하는 가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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