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전 게이지가 가득 찼을 땐 아는 맛이 필요해
독일 생활 초기 안정을 위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집을 구하는 것이었다. 처음에 마인츠로 온 이유는 내가 이곳의 석사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것이 우리 부부의 독일행 1순위 목표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곳에서 집을 구할 요량으로 여러 부동산 어플을 다운받아서 살펴보고 방문 예약을 잡기 위해 메시지를 보냈지만 돌아오는 건 대답 없는 기다림 뿐이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독일의 부동산 시장에서는 집주인이 여러 세입자 후보 중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고르기 때문에 세입자가 새 집을 찾기가 어렵고 적당한 집을 계약하기까지 시간도 오래 걸린다. 보통 계약 기간이 따로 정해져 있지 않고 세입자가 이사를 원할 때까지 계약이 이어지며, 보증금도 2-3달치 정도로 적기 때문에 안정적인 직업이 있거나 신용이 확실한 사람에게 집을 주기 마련이다. 우리는 막 입독한 외국인이라 신용을 증명할 수 없었고, 대학도시인 마인츠의 1월은 학기 중이자 부동산 비수기였기 때문에 매물 자체가 적어서 빨리 집을 구하기가 여의치 않았다.
산과 가족회의를 열었다. 석사는 빨라도 올해 10월에 시작이고, 사실 객관적으로 생각하면 내 독일어 실력을 9개월 만에 대학 수업이 가능한 수준으로 향상시킨다는 게 지나친 낙관이었으므로, 내년 진학으로 목표를 수정하는 게 그나마 합리적이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굳이 당장 마인츠에 머물러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다. 그러면? 주변 도시까지 후보군을 넓히고, 우리가 살게 될 도시는 운명에 맡기자!
그렇게 우리는 프랑크푸르트, 만하임, 하이델베르크까지 범위를 넓혀 주사위를 던졌다. 그 중 예산에 맞는 10곳에 독일어로 우리의 소개글을 작성해 보냈다. 원룸이나 1.5룸 위주로 연락을 돌렸는데, 보통 그 정도로 작은 집은 1명에게만 임대가 가능해 거절되거나 아예 회신이 오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업로드 된 지 1시간이 채 안되는 매물을 발견해 연락했고, 드디어 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 프랑크푸르트에 있는 집이었다.
동네를 둘러볼 겸 조금 일찍 집을 나섰다. 방문할 집이 위치한 지역에 있는 지하철 역에 도착해밖으로 나오자 따뜻한 색의 다세대 주택으로 물든 온화한 거리의 풍경이 펼쳐졌다. 조금 걸어서 다다른 커다란 공원에는 처음보는 높이의, 하늘에 닿을 것 같이 쭉 뻗은 나무들이 그곳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잎을 모두 떨어뜨려 가지를 드러낸 나무를 보며 이 곳의 봄과 여름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집에 살게 돼서 여기서 매일 산책하거나 조깅하면 너무 좋겠다."
"그러게. 그런데 다른 사람들도 집 보러 온다는데, 우리가 되겠어? 너무 기대하지 말자."
"그렇겠지? 그래도 여기 동네가 마음에 들어. 이런 곳에 살면 행복할 것 같아."
"아니 근데 나무가 진짜 커. 어떻게 저렇게 나무가 크지?"
기대하지 말자고 말하면서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는 산을 보면서 머릿속 나는 이미 이 동네에 살고 있었다. 아직 집은 보기도 전이었다.
약속 시간인 다섯 시 반이 되기 조금 전, 우리는 미래의 집이 될지도 모르는 건물 앞에 도착했다. 베이지 색 건물 외벽과 갈색 창틀, 창 밖으로 비치는 따뜻한 웜 라이트 주황색 조명이 모두 마음에 들었다.
"우와, 건물도 진짜 예뻐."
"그니까, 우리 이렇게 예쁜 집에서 사는 거야?"
"여기서 살면 너무너무 좋겠다!"
건물 안쪽에 있는 현관으로 가서 안내 받은 이름이 적힌 초인종을 찾았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그런 이름은 찾을 수가 없었다. 문 앞을 기웃거리고 있는데 갑자기 대문이 열리며 한 남자와 마주쳤다. 양 쪽 모두 흠칫 놀랐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수상한 사람처럼 보일 것 같아 일단 다시 밖으로 나왔다. 집을 잘못 찾아와서 허탕치는 건 아닐 지 마음이 초조해져서 주소를 다시 확인했다.
우리가 가야할 집은 건물번호 11, 우리가 서 있는 곳은 건물번호 12였다.
우리가 살 가능성이 0%인 집 앞에서 집이 너무 예쁘다며 호들갑을 떤 우리 스스로에게 창피해서 고개를 푹 숙이고 바로 앞 집으로 건너왔다. 11번 건물은 12번 건물보다 컸지만, 특색 없이 밋밋한 외관이어서 괜히 아쉬웠다.
초인종을 누르고 문이 열렸다. 계단으로 한 층 올라가 한국식으로는 2층인, 독일식 1층에 위치한 집으로 걸어갔다. 좌우로 길게 뻗은 복도의 오른쪽 첫 번째 집이었다. 키가 크고 마른, 스타일리시하면서 똑부러지는 인상의 사마론과 인사를 나누고 조심스럽게 집을 살펴봤다.
방 하나, 화장실, 부엌으로 구성된 아담하지만 편안해 보이는 집이었다. 현관에 들어서면 보이는 문 두 개 중 하나는 화장실, 하나는 방으로 이어졌다. 방에는 식탁과 책상, 침대, 서랍장 등 필요한 모든 가구가 구비되어 있었지만 공간이 꽤 넓어서 답답하지 않았다. 방의 한쪽 끝에 있는 문을 여니 아담한 주방이 나왔다. 1인 가구에게 적합하지만, 우리 둘이 지내기에도 충분해 보였다.
사마론은 이 집의 세입자로, 이사를 해야 해서 본인 이후의 다음 세입자를 찾고 있었다. 메시지를 독일어로 주고 받았던 탓에 사마론은 우리에게 엄청난 속도의 독일어로 집에 대해 설명해주었는데, 정확하고 천천히 말하는 독일어 듣기 파일과 현실 독일어는 차이가 있었고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리의 동공지진을 감지한 사마론은 영어가 더 편하냐며 다시 유창한 영어로 말하기 시작했다. 외국어로 대화해야 할 때면 나오는, 경청하는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고개 끄덕이기 모드를 켜고 눈치로 맥락을 알아듣기 위해 머리를 팽팽 돌렸다. 그리고는 응, 아니, 같은 대답만 하다가 질문이 있냐는 말에 그냥 집이 너무 예쁘고 마음에 든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치듯 서둘러 발길을 돌렸다. 사마론은 우리 이후에 집을 보기로 한 사람들이 더 있다며 만약에 우리가 선정된다면 며칠 안에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독일어와 영어 폭격으로 한껏 긴장했던 방문을 마치고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사마론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거의 아무 말도 못 했던 바보 이미지를 만회하고 우리가 정말 그 집을 원한다는 것을 어필하기 위해서. 집이 정말 마음에 들어서 그곳에서 살 수 있다면 기쁠 것이고, 우리는 지금 1년 생활비가 통장에 있고, 워킹 홀리데이 비자를 갖고 있어서 곧 일자리를 구할 것이며, 원한다면 몇 달치 월세를 미리 낼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정말 집을 깨끗하게 잘 쓸 수 있다는 말을 번역기와 사전의 힘을 빌려 구구절절 적었다. 그녀는 곧 연락을 주겠다는 다정한 답장을 보내주었다.
독일에 온 이후 매일 요리를 했던 우리는 오늘만큼은 그럴 힘이 없었다. 독일에 와서 가장 익숙해진 장소인 마인츠 중앙역에 도착해 무엇을 먹을지 살폈다. 오늘은 이미 도전 게이지가 차고 넘쳤으니 마음 편한 익숙한 음식이 필요했다. 알고 있는 메뉴, 알고 있는 주문 방법, 어디서나 실패가 없는 맛. 우리의 눈에 들어온 건 맥도날드였다.
그럼에도 또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메뉴를 도전해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메뉴판의 가장 위에 있는, 대표 메뉴로 추정되는 Big Tasty Bacon과 Hamburger Royal TS를 고르고, 하나만 감자튀김과 콜라가 있는 세트 메뉴로 주문하기로 했다. 앞 사람과 점원의 대화를 유심히 들으니 이곳에서는 세트 메뉴를 세트가 아닌 menü 라고 부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menü 하나, 버거 단품 하나를 무사히 주문해 신나게 집으로 왔다.
마인츠의 집에 도착해 포장한 햄버거를 허겁지겁 열었다. 시간은 벌써 9시가 다 되었고, 익숙한 냄새에 허기가 더 심해졌다. 쿼터파운드 치즈버거에 피클과 케첩 대신 양상추, 양파, 토마토와 화이트 소스가 듬뿍 든 Hamburger Royal TS는 내 취향을 저격한 햄버거였다. 버거킹 더블패티 와퍼의 맥도날드 버전이라고나 할까. 두툼한 패티와 양상추, 그리고 단맛이 적고 고소한 마요네즈와 유사한 화이트 소스는 가장 기본에 충실한 햄버거의 맛을 만들어냈다. Big Tasty Bacon은 이름처럼 번과 패티 모두 더 컸고, 치즈도 두 장, 베이컨, 양파, 토마토, 양상추, 그리고 빅맥 소스와 비슷한 듯 다른 소스로 구성된 버거였다. 다행히 Royal TS는 내 입맛에, Big Tasty Bacon은 산의 입맛에 더 잘 맞아서 다툼없이 각자의 버거를 차지했다.
이 넓은 독일 땅에서 어느 도시에, 어느 집에 살게 될 지 알 수 없는 미래를 잠시 뒤로 하고, 우리는 그저 아는 맛이 주는 확실한 즐거움을 온전히 누렸다. 부드러운 빵과 기름진 패티를 우물우물 씹을 수록 한껏 긴장했던 마음이 하나 둘 풀리는 것 같았다. 어디로 가든 맥도날드는 있겠지. 그럼 굶어 죽지는 않을 거야. 그럼, 다 잘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