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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소 Jun 26. 2020

내 장래 희망은 맥도날드 직원

 때는 바야흐로 초딩 시절. 10년을 조금 더 산 어린이 스키터는 집안의 막내딸로 태어나 좁게는 4인 가족, 넓게는 20여명의 친척 어른들과 사촌형제자매들 사이에 벌어지는 음식 쟁탈전에서 번번히 패했다. 집안의 막내이니 당연히 가장 조그만데다 먹는 속도까지 느려서 아빠는 내게 ‘집에서는 괜찮지만 밖에서 먹을 때 그렇게 느리게 먹으면 너의 몫을 빼앗기기 십상이다’라고 교육할 정도였다.(집에서도 3살 많은 언니에게 밀렸다. 그 때였을까? 밥 앞에서 매번 전투 태세를 갖추기 시작한 것이…?) 상을 한데 차려 나눠먹는 한국식 밥상에서 원하는 만큼 양껏 먹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직 배가 만족스럽게 부르지 않았는데, 숟가락을 내려놓고 싶지 않은데, 더 먹고 싶어도 번번이 빈 그릇을 마주해야 했다.


 우리 동네에서 버스로 15 거리인 경남 진해( 창원시 진해구) 중심부는 엄마의 다섯 자매  둘의 거주지였고, 종종 다니는 병원이 있는  우리 가족의 생활 반경 안에 있었다. 진해에  때면 나는 막연한 기대를 품었다. 맥도날드에서 햄버거를 먹을  있지 않을까?(내가 자주 가던 맥도날드 진해점은 아직도 운영 중이다.) 햄버거는 어린 시절의 나에게 공유하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음식  하나였다. 햄버거 1개는 오롯이 나의 몫이고, 천천히 먹어도 빼앗아 먹는 사람이 없었다. 햄버거를 먹을 때만은 조급하지 않고 여유롭게, 나의 속도로 음미할  있었다. (감자튀김은 쟁반에 부어 나눠 먹긴 했지만…)


 당시에 집이 꽤 여유로운 친구들이 피자헛이나 ‘라르꼬’ 라는 동네의 유일한 피자 가게 등에서 생일 파티를 열곤 했는데, 어린 마음에 호화롭게(?) 생일 파티를 하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나도 집이 아닌, 반짝이는 공간에서 생일 파티를 열고 싶어 엄마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딸의 생일파티 견적을 내 본 엄마는 맥도날드에서 생일 파티를 여는 것으로 타협점을 찾았다. 나는 평소에도 피자보다 햄버거를 좋아했고, 지금까지 맥도날드에서 생일 파티를 한 친구들은 없으니 친구들에게 최초의 경험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승낙했다.

 생일 직전의 토요일, 친한 친구들 6-8명 정도를 초대한 작은 파티가 열렸다. 엄마는 우리를 버스에 태워 진해까지 데려갔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에는 맥도날드에 생일파티 신청을 하면 직원 한분이 아이들을 데리고 파티 진행을 해줬다. 내 생일 파티를 담당한 분은 웃는 모습이 예쁜, 선한 인상의 언니였다. 생일 축하 음악이 온 매장에 울려 퍼지고 친구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내 앞에는 온전한 불고기 버거 1개와 감자튀김, 콜라가 있었다. 햄버거와 함께하는 생일파티라니, 이보다 완벽할 순 없었다. 맥도날드 언니는 약 1시간 동안 준비한 프로그램으로 우리를 즐겁게 해줬다. 풍선으로 강아지, 하트 등을 만들어줬던 걸로 기억한다. 친구들도 모두 만족한 표정이었고 성공적인 생일파티를 열었다는 생각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친절했던 맥도날드 언니와 정이 많이 들어버렸다. 헤어지길 아쉬워하는 우리에게 언니는 자신의 이메일 주소를 알려주며, 언제든지 연락해도 된다고 말했다. 언니에게 푹 빠져버린 나는 집으로 돌아가 바로 메일을 보냈다. 우리는 몇 번 연락을 주고 받았다. 대학생인 언니에게는 꼬맹이의 메일이 귀찮을 법도 한데도 항상 다정한 답장을 받을 수 있었다.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내 꿈은 맥도날드 직원이 되는 것이었다. 맑은 미소를 가진 언니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맥도날드 직원이 되면 햄버거를 매일 먹을 수 있겠지? 햄버거를 만드는 일도, 어른이 되어서 아이들과 재밌게 놀아주는 일도 모두 좋아보였다. 성인이 되고, 세상을 알게 되며 재미보다는 당장 손에 들어오는 돈이 중요해졌기에  많은 아르바이트 경험에도 불구하고 최저시급을 받으며 내내 바쁘게 일해야하는 맥도날드에서 일해본 적은 없지만,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는 아쉬운 마음이 남아 있다. 어린 시절의 꿈이 이뤄지지 못한 기분이랄까.


언니의 이메일 주소 아이디에는 ‘시나브로’라는 단어가 있었다. 그때 그 단어를 처음 알게된 나는 요즘도 ‘시나브로’를 발견할 때마다 그녀가 떠오른다. 우리는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가, 시나브로 모르는 사이가 되었다. 어린 내게 따뜻한 기억을 선물해준 그녀가 어딘가에서 잘 지내고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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