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결혼기념일_대영유통 / <강릉 여행기 2>
만족스러운 돈까스를 먹고, 촬영 장비도 가득 챙긴 산과 나는 다시 심기일전해 강릉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한시간 반 정도 운전을 한 산이 전날 얼마 못 잔 탓에 졸려 해서 잠깐 휴게소에서 쉬어가기로 했다. 시부모님이 주말마다 차박 여행을 다니신 덕분에 뒷좌석에는 이미 푹신한 라텍스와 이불이 깔려 있었다. 아침부터 헛짓 하느라 피곤했던 우리는 휴게소에 주차한 후 몸을 뉘었다. 몸을 감싸는 두툼한 차렵이불과 폭신한 라텍스의 감촉. 아… 너무 좋아… 틈만 나면 눕고 싶어하는 나같은 와식인간에게 언제든 누울 수 있는 이 작고도 큰 공간은 확실한 행복이었다. 분명 10분만 누워 있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우린 두 시간을 내리 잤다.(강릉 대체 언제 갈 거니…)
눈을 떴을 때 밖은 이미 빛이 점점 사라지고 어둠이 깔리기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별 거 한 일 없이 벌써 저녁이 되었다는 게 웃음만 나왔다. 서둘러 다시 강릉으로 향했고 한시간 가량을 더 달려 차박하기 좋은 스팟으로 추천 받은 사근진 해변에 도착했다. 힘들게 도착한 사근진 해변에서 우리가 가장 처음 마주한 것은?
야영(차박), 취사는 인근 야영장에서 즐겨주세요. 제발!!!
-경포동 주민센터-
무료로 차박이 가능한 곳이라고 해서 왔는데, 이게 대체 무슨 말인가? 게다가 평일 저녁이라 그런지 차박 여행객이 득실거릴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캠핑 분위기를 내고 있는 사람들은 한 명도 없었다. 차가 몇 대 주차되어 있긴 했지만 사진에서 보던 차박의 풍경처럼 트렁크를 열고, 고기를 굽고, 라면을 끓여먹는 풍경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고 깜깜하고 스산한 분위기의 바다만이 우리를 반겨줄 뿐이었다.
우리의 차박 여행은 숙소 예약도 귀찮고, 여행 일정도 짜기 싫고, 요즘 재정 상태도 그리 좋지 않으니 시부모님이 자주 다니시는 차박이나 해볼까? 하고 결정되었다. 그래서 나와 산 모두 차박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상태였다. 무작정 차와 장비들만 빌려서 강릉으로 쏜 것. 당황해서 검색을 시작했는데 ‘강릉 지역 해변 점령 불법 캠핑족 눈살’이라는 기사가 쏟아졌다. 일반 해수욕장에서 취사와 야영을 하는 것은 불법이지만 코로나 이후에 ‘차박 여행’이 떠오르면서 허가되지 않은 장소에서 캠핑을 하는 이들이 늘어 소음과 쓰레기로 인근 주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다는 것이다.
트렁크에는 이미 구워먹을 고기가 한가득이었다. 고기를 버릴 수는 없는데, 어떡하지? 현수막에 ‘인근 야영장’이라는 문구가 있었으니 인근에 야영장이 있을 터였다. 네이버 지도에서 야영장을 검색하니 ‘순긋해변 야영장’이 나왔다. 순긋해변을 또 검색해보니 ‘이곳은 야영장이 아닙니다.’라는 현수막 사진이 나왔다. 지도에서는 야영장이라는데, 또 야영장이 아니라고? 대체 어쩌라는 거야…
낭만적인 차박 여행이 사실은 모두 범법 행위였다니… 블로그에는 어떻게 이런 범법 행위의 현장이 코로나 시대의 행복한 여행 방법으로 포장되어서 한가득 올라오는 거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일들은 대체 무엇인가…! 우리는 할말을 잃은 채 ‘차박’, ‘차박 불법’, ‘강릉 야영장’ 등을 계속 검색해볼 뿐이었다.
그러다 ‘연곡해변솔향기캠핑장’의 ‘자동차 캠핑장’에서는 합법적으로 차박 캠핑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이용료는 25,000원이었지만 호텔보다는 훨씬 저렴했고, 차박 금지 현수막이 붙어 있는 이곳에서 범법자가 된 기분으로 결혼기념일을 보내느니 25,000원을 지불하는 것이 훨씬 나은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희망을 품고 도착한 연곡해변솔향기캠핑장. 종종 걸음으로 달려간 안내 데스크에서 ‘오늘은 예약이 꽉 차서 이용 가능한 공간이 없다.’라는 말이 돌아왔다. 현재 시간 저녁 7시 30분.
배가 너무 고팠다. 고기를 오늘 구워 먹긴 글렀다. 낭만적으로 바닷가에서 결혼기념일을 보낼 생각이었는데… 헛짓거리만 하다 이제 겨우 다섯 시간 남았다. 불행 중 다행으로 내일은 자동차 캠핑존에 2자리가 남아 있었다. 결국 우리는 여행 일정을 2박 3일으로 늘리고, 바닷가 캠핑은 다음 날 하는 걸로 계획을 수정했다. 오늘은 저녁을 다른 곳에서 먹고, 취사나 불을 피우지 않으면 차 안에서 잠을 자는 건 불법이 아니니 사근진 해변 주차장에 차를 대고 조용하게 잠만 자기로.
이왕 이렇게 된 일, 엄청나게 맛있는 걸 먹어야 했다. 예상치 못한 일에 급 스트레스가 머리 끝까지 차오른 상태. 결혼 기념일을 행복하게 마무리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주 만족스러운, 맛있는 저녁을 먹는 일이었다. 전전긍긍 캠핑장을 검색하던 초록창은 꼴도 보기 싫었고, 현재 상태로 새로운 맛집을 모험하는 것도 위험했다. 저녁마저 실패하면 울면서 잠들 것 같았다. 검증된 맛집이 필요했다. 번뜩! 생각난 곳, 그래, 대게를 먹으러 가자!기념일에 갈 법한 분위기 있는 곳은 아니지만 강릉 여행의 기분을 즐길 수 있고, 아무 때나 먹을 수 없는 값비싼 음식을 먹었다는 만족감도 채울 수 있는 완벽한 선택지는 대게였다. 올해 2월에 한번 다녀와 나에게 이미 검증된 맛집, ‘대영유통’으로 향했다.
전국으로 대게를 유통하는 대영유통이 직접 운영하는 주문진의 음식점인 이곳은 당일 동해에서 잡은 홍게와 러시아/노르웨이 등에서 직접 수입한 대게, 킹크랩 등을 판매한다. 가격은 시가로 책정되어 변동이 있고, 입구에서 살아 있는 게를 수조에서 꺼내 무게를 달아 정확한 가격을 안내한 다음 가게 내부로 들어가 식사를 하는 방식이다. 유의할 점은 처음에 알려주는 가격은 1kg 당 가격이고, 실제 게의 무게를 잰 다음 가격이 우리가 지불할 가격이라는 것이다.
지난 번 방문했을 때 옆 테이블의 킹크랩에 감명받았던 우리는 킹크랩을 먹으려고 했다.(우리는 홍게를 먹었었다.) 가게 밖의 수조 앞에서 시가가 10만원이라는 말에 „괜찮네?“ 하며 한 마리를 달라고 했다. 살아 있는 커다란 킹크랩이 저울에 올랐다. 그리고 사장님의 입에서 나온 말은 25만원. 띠용? 25만원? 10만원이 아니라? 시가인 10만원은 1kg 당 가격이라는 걸 잊고 순간적으로 킹크랩 한 마리가 10만원 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킹크랩 이 녀석… 누가 ‘킹’ 아니랄까봐 겁나 무겁네… 아무리 결혼 기념일이라도 돈을 아끼겠다고 차박을 하는 마당에 한 끼에 25만원을 쓸 수는 없었다.
- 나 : “대게는 얼마예요?”
- 사장님 : “A등급은 75,000원, 다른 건 65,000원이요.”
- 나 : “그럼 A등급으로 한번 달아봐 주세요.”
- 사장님 : “몇 마리 드릴까요?”
- 나 : “둘이 먹으려면 얼마나 해야 해요? 한 마리로 되나요?”
- 사장님 : “큰 거 한 마리 하시면 괜찮으실 거예요.”
위엄을 자랑하던 킹크랩은 다시 수조로 들어가고(괜찮아…내가 너 살려 준 거야ㅠ_ㅠ) 프린스 정도는 되어보이는 길쭉한 대게가 물 밖으로 나왔다. 대게도 무거우면 어떡하지… 하며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울에 올라가는 대게를 바라보았다. 가격은 11만원이었다. 너 이 녀석, 낙찰이다!
11만원이라고 적힌 계산서를 가지고 매장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일명 스끼다시라고 불리는 다양한 밑반찬과 회, 가리비, 새우, 소라, 오징어순대, 홍게 라면까지 테이블이 꽉 차게 차려졌다. 메인 메뉴가 아니기 때문에 해산물이 아주 좋은 퀄리티는 아니었지만 기본 찬으로 다양한 음식을 먹을 수 있다는 것에 만족스러웠다. 따뜻하긴 하지만 막 끓인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 홍게 라면의 국물을 입에 넣으니 염분과 감칠맛이 배고파 수축했던 온 몸을 깨우는 것 같았다. 역시 라면이야… 라면은 어떻게 항상 맛있는 거지? 동그랑땡 맛의 오징어순대에도 계속 손이 갔다.
곧 먹기 좋게 손질된 우리의 대게가 나왔다. 지난 번 방문에서 홍게를 세 마리나 먹었던 탓에 대게 한 마리의 비주얼은 그보다는 조촐했다. 그렇지만 홍게보다 훨씬 크고 통통한 대게는 다리 살까지 꽉 차 있었다.
곧장 게딱지밥을 주문했다. 게딱지를 주방으로 가져가서 날치알, 참기름, 통깨 등을 넣어 비빈 다음, 예쁘게 게딱지에 넣어서 가져다 주셨다. 홍게보다 대게의 몸통이 거의 2배는 되는지, 모자랄 줄 알았던 밥의 양이 꽤 넉넉했다. 잘 바른 대게 살과 함께 게딱지 밥을 숟가락으로 잘 떠서 입에 넣었다. 달큰한 대게 살과 고소한 게딱지밥의 풍미가 혀를 감쌌다. 아… 너무 맛있다! 이걸로 결혼기념일은 완성!
대게는 러시아, 노르웨이 수입산이고 홍게는 동해바다에서 직접 조업하신다고 하지만 대게도 냉동이 아니라 살아 있어 신선함의 차이는 크지 않은 것 같았다. 양은 많아 보이지만 생각보다 먹을 게 많이 없는 홍게보다 크고 실한 대게 한 마리가 더 만족스러웠다. 집게발도 통통하고!
SNS에 사진과 해시태그를 올려 인증하면 5% 할인을 받을 수 있는 이벤트가 있어 얼른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카운터에 제시했다. 최종 결제 금액은 104,500원. 게딱지밥에는 추가 요금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모두 서비스였다. 이렇게 맛있는 게딱지밥이 서비스라니! 날치알도 들어가는데! 부른 배와 기분 좋은 마음으로 가게를 나왔다. 차가운 공기도 대게의 에너지를 얻은 덕분에 선선하게 느껴졌다. 덩실덩실 리듬을 타며 주문진의 밤 거리를 걸었다.
편의점에서 칫솔을 사고, 챙겨온 세면도구를 들고 공영 주차장의 아무도 없는 화장실에서 세수와 양치를 했다. 코트를 입고 얼음장 같은 찬 물로 세수를 하고 나니 빨개진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하나만 산 수건을 내가 먼저 쓰고 남자 화장실 입구에서 산에게 건네주었다. 대게를 10만원 치를 먹고 이렇게 궁상을 떨다니… 웃음만 나왔다. 차가워진 얼굴에 발을 동동 구르며 차에 올랐다. 그렇게 우리는 몇 시간 전 충격에 휩싸였던 사근진 해변에 다시 도착했다.
보조배터리로 작동하는 작은 전기장판 두 개를 깔고 뒷좌석에 다시 몸을 뉘었다. 더 차가워진 공기에 이불을 턱 끝까지 끌어올리고 온기가 필요해 서로 다리를 포개고 달라붙었다. 추위는 우리를 이렇게 다정하게 만들어주는구나. 고마워, 2도의 밤공기야:)
시간은 밤 10시. 결혼 2주년 기념 여행으로 계획했던 보라카이의 리조트였다면 호화롭게 씨푸드 레스토랑에서 왕창 먹고, 욕조에 몸을 담근 다음 킹 사이즈 침대에 부드러운 가운만 입고 벌렁 드러누워 있었겠지? 바스락거리는 침구를 덮고 말이야. 현실은 다리도 쭉 뻗지 못하는 SUV의 뒷좌석에서 작은 전기 장판에 어떻게든 몸을 맞추려고 웅크려 있는 상태였지만 오늘도 이 사람과 잊지 못할 하루를 만들었구나, 하는 생각에 피식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불 속 작은 공간은 곧 동그란 온기로 채워졌고 깜깜한 어둠을 덮으며 나도 모르는 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