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박 여행의 아름다운 풍경과 뜨끈한 순두부_차현희순두부
<강릉 여행기 3>
날선 차가운 공기가 코를 베어갈 듯이 건드리는 바람에 잠에서 깼다. 이불을 머리 끝까지 덮고 손을 모아 얼굴을 감쌌다. 얼어 있던 얼굴 근육이 서서히 꿈틀거렸다. 영상 1-2도의 날씨에 야외에서, 차 안에서 잔다는 건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쉬고 싶어서 왔던 여행에서 피로를 얻어갈 판이었다. 12살에 갔던 정동진 새해 일출 여행의 고생이 떠올랐다. 좁은 관광버스에서 쪽잠을 자고 억지로 바닷가 앞에 날 세운 아빠를 향해 잔뜩 찡그린 채 사진을 찍은 그날 이후로 일출 여행은 내 인생에서 없는 일이었는데. 나이를 먹어 사서 고생을 하고 있구나. 그날에 비해서는 쾌적한 편이었지만 밤새 쭉 뻗지 못한 다리는 저리고 뻐근했다. 몸을 일으켜 앉아 다리를 뻗었다. 붉은 빛이 서서히 하늘을 물들이는 모습이 창 밖으로 보였다. 두 시간 전부터 화장실에 가고 싶었지만 추위를 이겨낼 자신이 없어 꾹 참고 있는 상태였다. 방광이 더는 이기지 못할 것 같기도 하고, 떠오르는 해를 보고 싶어 밖으로 나왔다.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햇살을 피해 별이 파도 속에 몸을 숨긴 것처럼 짙은 푸른 색의 바다는 반짝였다. 고요한 아침 바다에는 파도가 춤추는 시원한 소리만 들렸다. 세상을 잊을 수 있는 광경이었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은 순간이었다. 눈을 뜨자마자 맞는 바닷바람과 강렬한 태양이 삶의 온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았다.
‘이래서 차박을 하는구나’하고 생각하며 자고 있는 산을 깨웠다. 이 좋은 기분을 나누고, 이 순간을 함께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역시 내 맘대로 해줄 리가 없지. 추위에 약한 산은 이불을 돌돌 감싸기만 할 뿐 나올 생각이 없었다. 즐거운 기분을 해치고 싶지 않아서 서운한 마음을 억누르고 혼자 이 바다를 즐기기로 했다.
바스락거리는 모래를 밟으며 바다에 더 가까이 다가갔다. 굽이치는 밀물과 썰물을 한참 바라보기도 하고, 미세한 해의 움직임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렇게 멀리 바라본 게 언제인지, 또 이렇게 감각에 집중하던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멀리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처럼 차에서 잠만 잔 가족이 있었나 보다. 3-4살 정도 되어 보이는 아이와 그보다 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누나가 모래사장을 아장아장 걸으며 놀고 있었다. 꺄르르 웃는 순수한 즐거움에 흐뭇한 미소가 떠올랐다.
산을 데리러 차로 돌아왔다가 이불 속으로 쏙 들어왔고, 그가 왜 이불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지 바로 알아차렸다. 따뜻해. 나가기 싫다. 너무 좋다. 다시 잠이나 자자. 차 안에서 들리는 규칙적인 파도소리는 이곳을 오션뷰 호텔방으로 만들어주었고 곧 나는 다시 단잠에 빠졌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차 안으로 쏟아지는 햇빛에 잠에서 깼다. 시간은 벌써 아홉 시가 넘었고 배가 너무 고팠다. 여행의 소중한 한끼를 놓칠 수는 없지. 배고프다고 징징대며 산을 깨웠다.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모자를 눌러쓴 다음 따끈한 두부로 몸을 녹이기 위해 초당순두부길로 향했다.
강릉 초당동에는 초당순두부길이 있다. 정말로 주소 이름이 초당순두부길이다. 순두부를 파는 가게들이 모여 ‘순두부 골목’으로 유명해진 지역의 이름을 도로명 주소로 개편하면서 ‘초당순두부길’로 이름 붙인 듯하다. 조선시대 여성 시인 허난설헌과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아버지인 허엽이 강릉 삼척 부사로 있을 때 집 앞의 맛 좋은 샘물과 바닷물로 간수를 한 두부를 만들었는데 맛이 좋았다고 한다. 이에 자신의 호인 ‘초당’을 붙여 전국에 팔았고 초당이 살았던 지역 부근에서 그 비법이 전수되어 각자의 레시피를 추가한 두부집이 대를 이어 운영하고 있다. 지금도 강릉의 질 좋은 콩과 청정 동해 바닷물로 만들어진다고.
이곳에는 정말 많은 초당순두부집이 있는데 우리는 시부모님께 추천 받은 ‘차현희 순두부’에 갔다. 수요일 아침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손님이 꽤 많았다. 주말에는 웨이팅도 길다고 한다. 한쪽에는 두부 제조실이 크게 있었다. 직접 만든 신선한 두부를 먹을 생각을 하니 신이 났다. 아버님이 “무조건 정식을 시켜라.”고 하셨는데 그런 말씀을 잘 안 하시는 편이라 의아해하며 메뉴판을 보았다. 고소한 흰 두부를 먹고 싶었는데 주변에는 모두 빨간 두부 전골을 먹고 있었다. 대세를 따르기로 하고 ‘두부 전골 정식 2인분’을 주문했다.
곧 밑반찬이 나왔다. 아버님이 왜 ‘무조건 정식’을 주문하라고 하셨는지 곧바로 깨달았다. 정식에는 양념게장과 각종 나물을 비롯해 큰 가자미 한 마리와 황태구이까지 나왔다. 하얀 콩비지도 기본찬으로 나왔는데, 미지근했지만 고소하고 맛있었다.
곧이어 낙지 한 마리가 통째로 들어간 순두부 전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낙지를 제외하면 채소 등의 재료가 푸짐한 느낌은 아니었지만 두부와 당면으로 전골의 구색을 갖췄다. 포슬포슬한 순두부를 한 입 먹었다. 부드럽고 따뜻한 순두부가 밤새 얼어 있던 몸을 녹이는 것 같았다. 속이 뜨뜻해졌다.
두부 전골은 맛있었지만 특별하진 않았고 오히려 정식으로 나오는 생선들이 만족스러웠다. 가자미도 통통하고 맛이 좋았고, 무엇보다 황태구이 맛집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황태구이가 맛있었다.(황태구이가 메인메뉴인 줄… 크크) 두부 전골은 순두부찌개같은 느낌으로 강한 양념이 두부의 고소한 맛을 오히려 억눌러 아쉬웠다. 대세를 따르지 않고 소신 있는 나의 길을 갔어야 하는데, 메뉴 선정에서도 역시 소신이 필요하다.
지난 강릉 여행에서부터 가 보고 싶었던 순두부 젤라또 가게가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고소한 흰 두부의 욕구를 젤라또로 채우리라. 아이스크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데도 여러가지를 맛보고 싶어 ‘순두부 젤라또’와 ‘흑임자 젤라또’를 주문했다.
많이 달지 않은 젤라또를 기대했는데 내 입에는 너무 달았다. 흑임자는 차가운 떡을 먹는 것 같았다(더 달았다). 차에 앉아 시린 손을 붙잡으며 아까운 젤라또를 입에 넣다보니 왠지 모르게 점점 맛있어지는 것 같았다. 입이 단 맛에 적응을 하는 건가… 이상하네…
처음 가본 음식점, 처음 먹어본 음식은 결과가 어떻든 즐거운 경험을 만들어 준다. 지금 이 곳은 회사가 아니었고, 조금 멀리 떠나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리고 내게서 쉽게 볼 수 없는 긍정이 온 마음에 차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