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이야기(1)
이 겨울에 내가 버드피딩을 하면서 새를 유인하고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엄밀하게 말하면 소통의 즐거움은 아니다. 관찰하며 혼자서 사유하는 일방적인 즐거움이다. 오늘은 귤을 작게 잘라서 접시에 담아 툇마루에 두었더니 직박구리가 와서 잘도 먹는다. ‘사과도 달라’고 하지 않는다. 요구하지 않는 존재와의 평온함이다.
마을 빈터에 고양이들이 산다. 내 걸음 소리에 그들은 나보다 먼저 나를 피한다. 내가 고양이를 무서워하며 피해 다니는 것을 먼저 안 것일까? 곰곰 생각해 보니 왜 무서워했는지 특별한 이유도 없었다. 스스로에게 어이없었다. 그러던 중에 주말에 다녀 간 자녀들과 손녀가 고양이에게 관심을 보이자, 아이들이 돌아간 뒤에도 고양이들은 멀찍이 우리 집을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어느 날 닭모이를 사러 갔다가 고양이 밥까지 챙겨 든 남편의 등짝을 나도 모르게 후려치면서 만류했다. 내가 고양이를 무서워하는 걸 아는 남편은 아침마다 멀찍이 밥을 두었고 고양이는 먹고 사라졌다. 어디로 가는지 잠은 어디서 자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던 내가 지금은 츄르까지 먹이며 고양이와 함께 볕 바른 툇마루에 앉아 있는다. ‘강’이라고 부른다. 집을 지은 후 얼마 안 되어 우리 집 툇마루에 숨어 살던 강아지를 키우면서 지어준 이름 ‘진’과 함께, 임진강 가까이에서 만난 인연을 생각하며 붙인 이름이다. 버드피딩을 하고 개와 닭,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에는 즐거움과 평온함이 있다, 비록 수고는 있어도 고통 따위는 없다. 그들은 나에게 요구하지 않고, 나의 생각을 검증하지 않으며 나의 가치가 일관되는지 묻지 않는다. 나는 그들을 이해하려 애쓰지 않고, 그들 또한 나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나는 보고, 그들은 먹고, 각자의 세계로 돌아간다.
반면 사람과의 관계는 다르다. 사람은 말하고 들을 수 있으며 읽고 쓸 수 있는 존재다. 이것은 사회적 삶을 떠받치는 커뮤니케이션의 뿌리다. 그 커뮤니케이션은 혼자서 닿을 수 없는 의미를 타인들과 함께 만들어 가는 위대함과 즐거움을 주지만 때론 절망에까지 이르는 고통의 가능성을 활짝 열어 두기도 한다. 말은 오해될 수 있고, 글은 곡해될 수 있으며, 침묵조차 해석의 대상이 되는 것이 사람과의 커뮤니케이션에서 흔히 벌어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말함으로써 다가가려 하고 들음으로써 연결되려 하는 과정에서 행복과 상처를 동시에 갖는다. 말한다는 것은 검증의 위험부담을 감수하는 일종의 용기일 수 있고, 듣는 일 또한 객관적 사실 근거와 나의 주관적 가치가 충돌하는 어려움을 동반한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비겁이 묻은 말부터 아무런 사실 판단이 없는 잡설, 논리 없는 개소리까지 모두 커뮤니케이션의 큰 틀 안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하고 들을 수밖에 없는 존재, 그 모순 속에 인간의 고단함이 있다.
그래서 어렵다. 사람과의 소통은 늘 어렵다.
이 지점에서 나는, 소통에 실패했지만 끝내 말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한 사람을 떠올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