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 앞에 무너진 빈센트

-소통 이야기(2)

by tree

화가 공동체를 구상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고갱과 함께 살다 결별로 이어진 이야기는 널리 알려져 있다. 고갱과 함께 예술에 대한 희망을 나누던 공동생활은 9주 만에 끝났고, 빈센트가 자신의 귓불 일부를 자른 사건은 대중에게 단번에 그를 ‘미치광이’로 각인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사후에도 ‘광기 들린 천재 화가’라는 이미지는 오랜 세월 대중들을 지배해 왔다.


나 역시 빈센트에 대해 깊이 알기 전까지는 ‘광기’와 ‘천재’라는 두 단어가 머릿속에 박혀 있었다. 그러나 『Vincent Van Gogh』 (H. 안나 수 엮음, 이창실 옮김)를 읽으며 그 이미지는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이 책은 빈센트가 테오에게 보낸 668 통과 그 외 어머니, 여동생, 동료 화가들에게 보낸 천여 통에 가까운 편지를 엮었다. H. 안나 수는 서문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빈센트는 세 개 국어를 사용해 강렬하고도 호소력 있는 문장으로 자신을 표현한 사색적이고 지적인 인물이며 문학과 예술사에 조예가 깊었던 인물이다’. 또한 천재라는 수식어에 대해서도 ‘빈센트는 거의 독학한 화가로 초기 작품들을 보면 천부적 재능을 타고났다고 단언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오늘날의 공통된 견해’라고 덧붙인다.


내가 편지 속에서 만난 빈센트 역시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는 책을 무척 사랑했고 폭넓은 독서를 한 사람이었다. 편지에는 수많은 문학작품이 언급되며 성경 탐독과 함께 인간의 진실과 종교적 진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그림으로 나아가고자 한 흔적이 보인다. 문단의 잡지를 꾸준히 읽으며 배우고, 동료 화가들과 그림에 대해 대화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색채와 구도, 자신의 작업과 작품에 대한 치밀한 설명은 광인의 기질이라기보다 분석하고 사유하는 모습에 가까웠다. 제대로 된 미술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자세히 보고 몇몇 작품을 모사(模寫)한 뛰어난 관찰자였다. 그는 “마흔 번 이상의 반복 연습을 하여야 무언가 가치 있는 것을 얻게 될 거라 "고 썼고, 실제로 그 이상을 연습하며 녹초가 되도록 부단히 노력한 사람이었다.

이런 그를 ‘광기’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을까. 어쩌면 ‘광기’는 소통을 갈망하던 한 사람이 절망의 벽 앞에서 무너진, 단 한순간의 사건에 붙여진 것이 아니었을까. 화단은 생전의 그를 외면했고, 그의 죽음조차 거의 언급하지 않았다는데 그렇다면 ‘천재’라는 수식어는 누구로부터 어떻게 붙여진 것일까. 사후의 찬사는 그를 이해하려는 노력 대신 붙여진 가장 쉬운 이름이었다.


빈센트는 그림 그리기에 대해 이렇게 적는다. ‘그림이란 게 뭘까? 어떻게 해야 그림을 잘 그릴 수 있을까? 그건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존재하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아무리 두드려도 부서지지 않는 그 벽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내 생각에는 인내심을 갖고 삽질을 해서 그 벽 밑을 파내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빈센트 반 고흐, 영혼의 편지』(신성림 번역, 엮음, 109쪽) 그가 말한 철벽은 그림 앞에만 놓여 있던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와 교단의 배척으로 인한 종교의 철벽, 시엔(임신한 채 딸아이와 함께 버림받은 여자)과 가정을 이루고자 했을 때 그에게는 관습과 예절, 교양을 숭배하던 시대의 철벽이 세워졌다. 그리고 ‘자신 안에 꼭꼭 숨겨두지 못하는’(편지 338) 정직한 말하기 앞에는 언제나 편견과 사회 통념의 철벽이 가로막고 있었다. 그는 어쩌면 철벽 앞에서 고립될 것을 알면서도 진실의 뿌리가 무엇인지 말하는 선택적 용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의 ‘화가 공동체’ 구상 역시 같은 맥락에 놓여 있다. 개인 화가가 시장과 직접 싸워 이길 수 없었던 19세기 파리의 ‘살롱과 화상 중심’ 구조 속에서 그는 살롱에 기대지 않고 화상들에게 휘둘리지 않는 대안적 공동체를 꿈꾸었다. 남부 아를에 가서 아틀리에 ‘노란 집’을 만든 것은 각자 흩어져 굶는 구조, 현실에 대한 절박한 인식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테오와 함께 살았던 몽마르트르 언덕 기슭은 파리의 변두리로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살롱 제도권에서 밀려나거나 출품조차 거부당하는 실험적 화가들이 이곳에 모였고 빈센트 역시 그중 하나였다. 불공정하고 생계마저 위협당하는 그곳을 떠나는 일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화가들과 같이 살며 서로의 작업에 영감을 주고,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고 지속적으로 그림을 그리려는 절실한 희망의 선택이었다. 그는 먼저 아를로 내려가 허름한 집을 빌려 외벽을 온통 노란색으로 칠했다. 빈센트가 구상한 화가 공동체 아틀리에 ‘노란 집’이다. 고갱의 침실을 장식하려고 태양의 꽃 해바라기를 그리며 빛을 향한 열망을 품었다. 고갱의 재능을 확신한 테오가 경제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를 돕고자 했음을 빈센트는 잘 알고 있었다. 평생 테오에게 부채감을 안고 살아온 그는 고갱과 함께 사는 것이 테오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다는 생각도 있었다. 아를의 ‘노란 집’은 화가로서의 삶의 연대와 생존을 동시에 모색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고갱과 함께한 생활은 불행하게도 결별로 끝났다. 모든 희망과 열망은 그곳에서 절망의 철벽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그 벽을 끝내 넘지 못했고 소통에 실패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역설적으로, 연대를 희망하다가 고립된 사람, 소통의 희망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빈센트를 본다. 빈센트는 미쳐서 고립된 사람이 아니라 누구보다 소통을 갈망했기에 더 깊이 상처 입고, 더 많이 부숴진 사람이 아니었을까.


<알리스캉, 가을. 빈센트> 존경하는 고갱이 아를에 온 후, 빈센트가 아름다움을 보여 주고 싶어서 소개한 장소. 고대 로마시대부터 이어진 길이며 공동묘지가 남아있다. 고갱과 빈센트가 함께 걸었고 같은 풍경을 함께 보며 각자의 캔버스에 담는다.


<알리스캉, 풍경. 고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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