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통이야기(3)
서로를 존경했지만 결국 함께 사는 것을 끝내야 했던 두 예술가, 폴 고갱과 빈센트 반 고흐.
이들의 결별은 흔히 예술의 견해 차이를 끝내 좁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된다. 그러나 예술에 문외한인 나로서는 그 ‘견해 차이’가 무엇이었는지 쉽게 가늠하기 어렵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관계는 필연적으로 견해 차이가 생긴다. 그 차이를 좁히며 함께 살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결별을 선택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기도 한다. 공동체 생활은 존경하는 동료들에게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극빈 속에서도 그림을 계속 그릴 수 있는 거의 유일하고도 절박한 대안이었다. 이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사람 또한 빈센트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스스로를 자해하는 지점까지 이르며 결별을 맞이해야 했다. 과연 그것이 예술관의 차이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일이었을까. 옳고 그름, 이익과 손실을 계산하지 않고도 결별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선택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빈센트에게 예술은 선택지가 아니었다. 그것은 생존의 문제였고 세상과 자신을 이어주던 거의 유일한 통로였다. 그 통로가 막히는 순간, 선택은 더 이상 선택이 아니게 된다.
빈센트에게 그림은 세상과 소통하는 언어였다. 그는 열여섯 살(1869년)에 구필화랑의 점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스물다섯에는 신학교에 들어갔으며 그 후 벨기에 탄광지역에서 전도자로 살아갔다. 광부들과 똑같은 생활을 하며 가난한 사람들 곁에 머물던 그곳에서 그는 화가가 되어야겠다고 결심한다. 탄광지역 보리나주에서 그들과 똑같이 노동하는 제약된 조건 속에서도 광부들의 일상과 가난한 삶을 스케치했고, 1882년 헤이그의 안톤 마우베를 찾아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을 때 그는 이미 이십 대 중반을 훌쩍 넘긴 나이였다.
마우베와 테르스테이흐 두 화가의 도움으로 헤이그에 아틀리에를 얻어 정착했지만, 이 시기에 ‘시엔’과의 일이 생긴다. 이 일로 부모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대립했고 두 화가로부터도 ‘사회로부터 추방당해야 마땅한 인간’, ‘헤이그에서는 살 수 없을 것’이라는 혹독한 비난을 받았다. 결국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시엔과 헤어지게 되지만, 빈센트는 테오에게 이렇게 묻는다. ‘시엔’은 평범한 사람이며 나는 평범한 사람이 숭고하게 보여. 한 여자를 저버리는 일과 버림받은 여자를 돌보는 일 중에 내가 어떻게 해야 쓸모 있고 의미 있는 존재가 될 수 있을까 생각해. 나는 그들이 나를 비난하는 말에 동의할 수 없구나.(중략) 일꾼이나 가난한 사람의 집에 들어간다고 해서 또 그들을 내 아틀리에에 들여놓는다 해서 나 자신이 싸구려가 되는 걸까? (편지 190)
보리나주에서 광부들과 똑같은 삶을 살았던 태도와 시엔을 ‘평범’한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닮아 있다. 전도자였을 때나 화가였을 때나 그는 언제나 고통받는 인간의 영혼 깊숙한 곳으로 들어가 그들과 함께하려 했다.
이후 테오의 경제 상황마저 불투명해지면서 그는 부모가 있는 뉘에넌의 집으로 돌아가 살게 된다.(1883년) 그러나 ‘시엔’의 사건 이후 가족의 일원으로 대접을 받지 못하며 부모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고, 그는 쓰지 않던 세탁실을 아틀리에로 만들어 2년 가까이 지냈다. 관계가 단절된 곳에서 보낸 고립의 시간이었다. 그런데 나는 이 시기에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들을 읽으면서 고립의 감정을 거의 느끼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지금 무엇을 그리고 있는지, 새롭게 발견하고 그리된 것에 대해 생생한 문장으로 써 내려간다. 하루 종일 쉼 없이 그림을 그렸고, 감자밭을 파 엎는 남자들의 뒤를 따라 걸으며 스케치를 했다.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는 날이 단 하루도 없다고 적는다. 그 편지들에는 자신의 화법과 빛의 효과를 발견하는 환희, 색의 다양한 변이를 탐구하는 열정, 그리고 자신에게 스펙트럼처럼 확장되는 색채감각에 대한 희망이 가득 차 있다.
‘쉽지 않겠지만 이렇게 하고 싶어’, ‘앞으로는 지금보다 더 잘할 수 있기를 바라며 또 그렇게 노력하고 있어’. ‘여기서 멈추지 않을 거야. 다음번엔 더 잘할 수 있겠지’, ‘머지않아 큰 변화가 있을 거야’라는 기대감 등의 내용은 그가 얼마나 노력하고 있는지, 자연과 깊게 소통하고 있는지 알게 한다.
그가 소통하는 자연은 단순한 풍광이 아니었다. 그 안에는 사람이 있었다. 자연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붓을 들거나 심지어 상상하기조차 겁이 난다고 말하면서도, 그 자연 속에는 삽을 움켜쥔 손, 토탄을 캐고 땅을 일구며 굽은 허리로 감자를 캐는 가난한 사람들이 있었다. 빈센트에게 자연이란 인간의 고된 노동과 가난, 그리고 슬픔까지 모두 포함하는 것이었다. 빈센트는 생전에 프랑스 화가 장 프랑수아 밀레를 깊이 존경했다. 밀레의 그림을 통해 예술이 단순히 아름다움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진실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깊이 공감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숭고하게 드러내는 밀레의 그림은 그에게 하나의 방향이 되었다.
고립된 생활이었지만 그의 사유는 오히려 더 깊고 단단하게 뿌리를 내렸다. 마침내 1885년, 테오의 생일에 맞춰 그린 <감자 먹는 사람들>이 탄생한다. 수많은 밤을 지새우며 수십 번의 농부 얼굴 습작을 거쳤고, 밤마다 가난한 집의 오두막을 찾아가 현장에서 관찰하며 완성한 작품이었다. 그는 이 작품을 그때까지 자신이 그린 그림 중 최고의 작품이라고 자부했다. 특별히 표현하고 싶은 것은 ‘생명’이며, ‘진실되고 정직한 그림’이라고 테오에게 썼다. 그리고 이 그림을 왜 그렇게 그렸는지 편지에서 여러 차례 자세히 설명한다.
‘작은 등불 아래서 접시에 담긴 감자를 손으로 먹는 그들을 그리며 나는 마치 그들이 땅을 파는 사람들처럼 보이도록,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내려고 애썼단다. 이 사람들이 먹고 있는 건 자신들의 노동을 통해 정직하게 얻은 것임을 말하고 싶었지’(편지 404)
이는 그가 밀레의 그림을 보며 ‘밀레의 그림 속 농부들은 자신들이 씨를 뿌린 흙의 모습으로 그려진 것 같다’에 공감한 것과 맞닿아 있다. 땅에 몸을 낮춘 가난한 농부들의 모습에서 숭고함을 느낀 빈센트는 땅을 팠던 거친 손으로 감자를 먹고 있는 가난한 사람들을 그렸다. 그것이 빈센트가 표현하고자 했던 ‘진실과 정직’의 옷을 입은 ‘생명’이 아니었을까.
그의 그림은 사실을 그렸지만 진실과 정직을 품은 흙의 언어였다. 세상과의 길이 막힌 듯 보였지만, 그의 영혼은 자연 속에서 흙의 언어로 충만하게 소통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