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새를 부르는 일

-버드피딩

by tree

올봄, 거실 창 가까이에 붉은 인동초를 심었다. 덩굴이 잘 오르도록 대나무를 둘러 주었는데, 겨울이 되자 뜻밖의 손님들이 찾아왔다. 대나무 지지대 위에 새들이 자주 앉았다가 날아가는 것이다. 인동초를 위해 세운 대나무 지지대가 의도치 않게 새들이 잠시 쉬어가는 자리가 되었다. 새들의 소리는 페티오 창의 3중 유리를 뚫고 조용한 실내로 또렷하게 스며든다. 문득 궁금해졌다. 차음 성능이 좋은 이 유리를 뚫고 들려오는 이 새소리는 과연 어느 정도의 데시벨(dB)일까. 찾아보니, 도서관처럼 조용한 공간에서 누군가 내게 속삭이는 정도의 소리라고 한다. ‘짹짹짹’ 반복되는 리듬은 실내에 앉아 있는 나의 시선을 자꾸만 밖으로 끌어당긴다. 부엌 옆 산딸나무에서 대나무 지지대로 날아오르는 그들의 날렵한 몸짓을 바라보다가, 나는 밖으로 나가 얼마 전 버렸던 것을 다시 주워 왔다. 수세미 속심이다. 수세미를 쓰기 좋게 바느질하기 위해 떼내고 버렸던 속심은 단단하고 구멍이 숭숭 뚫려 있어 버드피딩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손님들이 그냥 가는 것이 아쉬웠던 나는 아껴 먹던 땅콩을 꺼내 방망이로 부수고, 속심에 땅콩버터를 고루 바른 후 부순 땅콩에 굴렸다. 숭숭 뚫린 구멍마다 꾹꾹 눌러 채운 뒤 새들이 먹기 좋은 자리에 매달아 두었더니, 더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나는 어쩌자고 새들까지 불러들이고 있는가.


버드피딩(Bird Feeding)은 야생 조류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서양의 문화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까치 등의 새들이 먹도록 일부러 남겨 두는 감, ’까치밥‘이라는 전통이 있으니 전혀 낯선 일은 아니다. 얼결에 버드피딩을 하고 나서 머뭇거려지는 점이 있었다. 인위적인 먹이 주기가 새들의 야생성을 약화시키고 의존성을 키우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 때문이었다. 마침 서울에 사는 손녀의 학교에서 버드피딩을 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관련 글을 받아 읽어 보았다. 도시는 곤충과 식물의 서식지가 점점 줄어들고, 겨울은 새들에게도 춥고 밤은 길어 체온을 유지하기에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고 한다. 먹이를 찾기 위해 더 자주, 더 많이 날아다녀야 하는 새들에게 버드피딩은 분명 도움이 되는 활동이다. 무엇보다 어린아이들에게는 사람과 자연을 연결하는 경험이 되어, 자연에 대한 관심을 키워 주는 소중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시골에 사는 나, 주변에 산이 있고 너른 밭들이 있는 곳에서 과연 버드피딩이 필요한 일일까? 그래서 자료를 더 찾아보았다. 조류학·도시 생태학 연구자인 케이트 플러머 (Kate Plummer)가 BTO(British Trust for Ornithology) 공식 블로그에 쓴 글 < TO feed or not to feed>는 내게 적잖이 흥미로웠다.


산의 열매와 곤충이 충분한 계절에는 굳이 모이통이 필요 없지만, 겨울에는 먹이를 쉽게 찾기 어려워 버드피딩에 비교적 긍정적인 연구 결과가 많았다. 혹독한 추위 속에서도 모이통의 음식은 새들의 주식이 아니라 보충제 역할에 그치며, 인간이 주는 먹이에 완전히 의존하는 모습은 관찰되지 않았다고 한다. 즉, 버드피딩이 새들의 의존성을 키워 자연 먹이를 찾는 능력을 잃는다는 증거는 없다는 것이다. 도움을 받되 '완전히 의존하지 않는다'(20% 미만 의존)는 이 관찰 결과가 내겐 특히 인상 깊었다. 인간은 미래를 대비하기 위해 도움이 되었던 정보들을 끊임없이 추적하면서 생존 방식을 발전시켜 왔다. 이러한 방식은 편리함을 낳고, 편리함은 흔히 더 많은 소유로 이어진다. 소유는 안정감을 주는 동시에 의존을 낳고 키운다. 반면 새들은 도움이 되는 것을 찾고 활용하지만 완전히 의존하지 않고, 모이통이 있어도 날마다 부단히 날아올라 먹이를 찾는다. 그 또한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그들의 생존 방식일 것이다. 나는 그동안 새의 자유로움을 그들이 날 수 있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중력을 거스르는 날개는 자유의 상징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새들의 자유는 날 수 있다는 그 자체보다, 완전히 의존하지 않으며 길들여지지 않는 생존 방식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심고 거두어 창고에 모아들임으로 안정성을 확보하고, 점점 의존성을 키우며 사는 인간의 대응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수세미 피더(feeder)가 여러 개 걸려 있는 컴포트 존(comfort zone)을 벗어나더라도, 새들은 길을 잃지 않는다. 겨울철 버드피딩은 먹이 찾기가 조금 어려워진 겨울에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약간의 도움을 주는 일이다. 새들은 신뢰할 수 있는 먹이 공급원이 생기면 기억하고 찾는다고 한다. 이 겨울, 나는 그들의 먹이 활동을 조금 수월하게 해주는 대신, 내 눈과 귀는 더 많은 즐거움을 얻기로 했다. 자유에 대한 사유는 덤이다. 그래서 모이통을 하나 사서 걸어 두었다. 내가 새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 같지만, 버드피딩이 주는 가장 큰 선물은 결국 새들로부터 내가 받는 셈이다.


나는 나무와 풀, 꽃은 본래 주인이 따로 없다고 생각한다. 바라보는 사람이 잠시 주인이 될 뿐이다. 옆집에서 심은 나무와 꽃을 바라보며 마치 내 집 마당에 심은 나무와 꽃처럼 여기며 좋아라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담장을 세우고 ‘내 집 마당’ 영역 안에 심은 나무는 개인의 소유가 되면서 그 나무와 꽃의 아름다움 또한 개인화된다. 소유로 아름다움이 개인화되는 것은 담장이 없는 이 마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 담장이 없는 이 마을에서는 제집 마당의 풀을 잡고 꽃을 가꾸며 나무를 심는 것은 무언의 배려이자 동시에 아름다움을 함께 증폭시키는 일이다. 그런데 이 겨울, 버드피딩을 하는 나는 더 가까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새들을 내 집 마당으로 유인하고 있다. 우리 집에 더 오래 머물러 주면 내 집 새라도 되는 양 그 즐거움을 개인화하고 싶은 얼토당토않는 마음이 생긴다. 빠른 배속의 영상처럼 날아다니는 새들을 어찌 내 집 마당에 가두고 즐거움을 개인화할 수 있다는 말인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이라는 것을 알면서 꾸는 이 겨울의 꿈은 즐겁다.


같은 집에서 같은 공간의 같은 새들을 바라보며 살고 있는 남자의 심정은 나와는 좀 다른가 보다

멀리 세상은 시끄럽고

산중은 깊어 눈보라 쳐도

산딸나무 마른 가지에

웃는지 웃기는지 키드득

날아왔다 저기로 날아가고

돌아와서 제멋대로 폴짝

제 맘대로 촐랑촐랑

한없이 가벼운 자유를

혼자서 해종일 지켜보자면

굳이 새 이름을 알거나

창문을 닦지 않아도 된다

바라는 바도 할 일도 없어

누가 불러도 나갈 일 없이

세상 소란에서 한발 물러나

그저 새나 바라보는 것은

한가한 소일이 아니라

허송세월을 즐기는 일이다(전종호, '허송세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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