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리는 빈센트

소통이야기(5)

by tree

사람은 언제 흔들리는가. 세상이 자신을 거부할 때가 아니라, 자신과 전혀 다른 확신을 가진 타인과 마주할 때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아가며 수없이 흔들리지 않는가. 살기 위해 포기하기도 하고, 살기 위해 끝내 포기하지 않기도 한다. 두 선택 모두 결국 ‘살기 위함’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내려놓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고, 끝까지 붙드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으려 애쓰는 일, 그 모든 용기는 얼마나 아픈 과정인가. 아를에서 빈센트는 마침내 그런 만남을 맞이하며, 그 길 위에 서게 된다.


미술사 연구자들 역시 두 사람의 결별을 단순하게 설명하지 않는다. 예술관의 차이, 성격과 생활 방식의 갈등, 공동체 실험의 실패와 경제적 압박 등 복합적으로 함께 언급한다. 모두 설득력 있는 설명이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한가라는 질문 앞에서 나는 멈춰 서게 된다. 자주 거론되는 성격과 생활 방식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마치 배려를 못했다거나 주장을 굽히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빈센트에게 고갱은 존경하는 화가였다. 미술사학자들은 두 사람이 서로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고 평가한다. 여러 해석 가운데 나는 특히 ‘회화에 대한 존재론적 태도의 차이’라는 설명에 오래 머물렀다. 예술에 문외한인 내게 어려운 말이었지만 편지 속 빈센트의 생각을 따라 읽으며 조금씩 이해하고 공감하게 되었다.


빈센트는 1886년 3월에 파리로 가서 테오와 함께 지내기 시작했고, 1888년 2월 말 프랑스 남부의 작은 도시 아를로 옮겼다. 9월에는 꿈꾸던 화가 공동체 ‘노란 집’을 마련했고, 10월 하순 고갱이 도착했으며 12월 하순에 고갱은 아를을 떠난다. 나는 빈센트의 편지를 따라 그의 여정을 함께 걷지만, 파리 시절 그의 내면을 보여주는 편지는 읽을 수 없었다. 테오와 함께 살았기 때문이다. 다만 아를에서 파리에서 함께 지냈던 인상파 화가들에 대한 생각을 담은 편지를 통해 그가 무엇을 고민했는지 조심스럽게 짐작할 뿐이다.


‘쇠라의 기법에 대해 자주 생각하지만 결코 추종하지는 않아. 시냐크도 마찬가지지만 차원이 다르지. 그들이 발명한 점묘법은 새로운 기법이고, 난 두 사람을 정말 좋아한단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난 파리로 가기 전에 추구했던 것들로 되돌아갈 생각이야’(편지 539.1888.9.17)


‘너도 알다시피 난 추위에 강한 편이 아니야. 집 안에 머무를 수 있으니 상상을 통해 작업하는 것도 그리 불쾌한 일은 아니지만, 상상해서 뉘에넌 정원을 그리다 망치고 말았지. 상상을 통해 작업하려면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편지 559.1888.11.6)


‘나는 모델 없이는 작업을 할 수 없네. 습작을 그림으로 옮기거나 그 색상을 배치하고, 확대 혹은 단순화할 때 자연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야. 하지만 형태의 진실성이나 가능성으로부터 일탈하게 될까 봐 두렵다네. 십 년을 더 공부한 다음이라면 해낼 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가능한 것과 진짜 존재하는 것에 대해 난 호기심이 무척 많네. 그래서 나의 추상적인 습작들에서 끌어낼 수 있는 이상적인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추구할 용기가 없다네. 다른 사람들의 추상적인 습작들은 나보다 통찰력이 더 뛰어난 것 같네. 자네도 그렇고 고갱도 마찬가지고. 나도 나이가 들면 그렇게 될지 모르지.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연에서 양식을 취하고 있지. 과장을 하거나 때론 소재에 변화를 주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림을 모두 상상해서 그리지는 않아. 오히려 자연 속에 이미 그 그림이 완성되어 있어 나는 실타래를 풀 듯 해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따름이지’(베르나르에게 보내는 편지 1888.10.7)


빈센트에게 자연은 단순한 소재가 아니라 존재의 근거였다. 자연과의 소통 속에서 그려 온 그의 그림은 하나의 스타일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었다. 삶의 방식이 다르다면, 존경하는 동료에게 받는 영향조차 때로는 스스로에게 위협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많은 학자들이 조심스럽게 말하듯, 그것은 곧 존재론적 불안으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자연과 내밀하게 연결되어 있던 그는 존재론적 차이 앞에서 흔들렸을지도 모른다. 사람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고 관계는 필연적으로 견해 차이로 인한 갈등이 유발된다. 우리는 학습된 윤리적 잣대로 차이애서 비롯된 갈등을 쉽게 재단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빈센트의 흔들림은 존경과 함께 오는 불안이었고, 그것은 서로 다른 감정이 아니라 어쩌면 동시에 존재했는지도 모른다.


나는 한 일화를 떠올린다. 빈센트 생전에 공식적으로 판매된 유일한 작품은 <아를의 붉은 포도밭>이다. 화가이자 컬렉터였던 안나 보쉬는 이 그림을 400프랑에 구입해서 손님들을 초대해 파티를 열며 감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이 그림을 파리의 갤러리에 팔았다. 재력가였던 그녀는 수많은 그림들을 소장했고, 훗날 그녀의 뜻에 따라 그림들을 팔아 가난한 예술가를 지원했다고 한다. 그런데 빈센트의 그림은 왜 팔았을까? 이유는 돈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그림이 주는 압도감 때문이었다는 전언(傳言)이 남아있다. 자신의 작업 방식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고, 창작을 지속하기 위해 그림을 벽에서 내려야 했다는 이야기다. 이 일화는 사실 여부와 별개로, 미술계에서 전언되는 이야기다. 이 일화가 오래 전해지는 이유는 많은 예술가들이 실제로 경험하는 감정과 닿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을 회화에 대한 존재론적 태도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아를은 희망의 안식처로 시작했으나 동시에 평생 그를 괴롭힌 발작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통의 장소이기도 했다. 미래가 불확실했던 파리 시절의 해바라기는 아를에서 태양의 꽃으로 바뀌었다. 고갱의 방을 장식하기 위해 그린 해바라기, 그는 해바라기를 그릴 때 “자신이 끌어 모을 수 있는 모든 에너지와 집중력이 필요했다”라고 썼다. 그렇게 시작한 해바라기 연작은 고갱과의 결별 이후 다시는 그리지 않았다. 그는 회복 후 노란 집으로 돌아와(1889년 1월) 붕대를 감은 채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고통스러운 나날이었지만 자신의 상태를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불안해하던 이웃 주민들의 신고와 비난을 받아들이며, 요양원에 입원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테오에게 부탁한다. “온 힘을 다해 그림을 그리고 싶다”는 단 하나의 이유였다. 그는 3월 생레미 요양원에 들어가고, 4월 테오는 결혼한다. 요양원은 새로운 안식처이자 또 다른 고립이었다. 그곳에서 그의 육체는 거세게 흔들렸다. “따뜻한 우애로 이 모든 것을 베푼, 그토록 오랫동안 항상 나를 지지해 준 유일한 너는, 나를 먹여 살리느라 늘 가난하게 지냈지. 네가 보내준 돈은 꼭 갚을게. 안 되면 내 영혼을 줄게”. 그의 편지는 깊은 슬픔 속에 있다. 육체는 흔들리며 흔들리지 않으려 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거세게 흔들려도, 흔들리면서 그는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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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병 속 해바라기 열다섯 송이, 빈센트 반고흐, 1888. 런던 내셔날 갤러리 소장>


흔들린다 -함민복

나무는 가지를 벨 때마다 흔들림이 심해지고

흔들림에 흔들림 가지가 무성해져

나무는 부들부들 몸통을 떤다


나무는 최선을 다해 중심을 잡고 있었구나

가지 하나 이파리 하나하나까지

흔들리지 않으려 흔들렸었구나

흔들려 덜 흔들렸었구나

흔들림 중심에 나무는 서 있었구나


그늘을 다스리는 일도 숨을 쉬는 일도

결혼하고 자식을 낳고 직장을 옮기는 일도 다

흔들리지 않으려고 흔들리고

흔들려 흔들리지 않으려고

가지 뻗고 이파리 틔우는 일이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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