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농(始農), 소리로 열리다

by tree

맞은편 집에서 하우스 비닐을 교체하고 있다. 힘이 부딪히는 소리가 고요를 뚫는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비닐의 마찰음, 사람들이 호흡을 맞추는 짧은 외침, 한동안 장정 여러 명이 왁자하게 움직인다. 웅성대던 기척이 잦아들자 이번에는 고기 굽는 냄새가 건너온다. 불판에 둘러싼 웃음이 따라온다.


탈탈탈, 오랜만에 경운기 소리가 들린다. 우리 집 옆 도로를 타고 밭으로 올라가시는 영감님이다. 매번 인사를 건네지만 한 번도 답을 들은 적은 없다. 나는 그리 인사성이 밝은 사람이 아니지만, 귀촌한 뒤로는 ‘인사가 만사’라 여기며 무조건 먼저 입을 연다.

“안녕하세요오오~~~”

내 목소리도 고요를 깬다. 영감님이 거의 듣지 못한다는 것을 최근에야 알았다. 그래도 거르지 않고 인사한다. 내 인사는 경운기 소리에 묻히지만 그 소리에 맞추는 나의 추임새다.


마을 밭 곳곳에 트랙터와 포클레인이 들어앉아 있다. 쇳덩이들이 짐승처럼 울며 흙을 뒤집는다. 밭주인들의 손발이 바쁘게 움직이고, 그 부산함이 봄볕과 뒤섞여 멀리서도 들린다.


암탉이 알을 낳았나 보다. ‘꼬꼬댁, 꼬꼬꼬꼬’ 되돌이표처럼 울음이 이어진다. 우리 집 어린 수탉은 변성기를 겪고 있다. ‘꼬오..끼익..꼬오..크오-’ 짧게 끊기는 삑사리다. 큰 수탉에게 쫓기면서도 목을 길게 빼고 가슴 펴며 암탉 주변에서 과시 중이다. 그때, 보란 듯이 그뤠이(우리 집 장닭)가 우렁차게 운다. ‘꼬끼오오오오~!’

별목련이 팡팡 터지는 소리, 수선화가 땅을 밀고 올라오는 소리, 이 모든 것이 자동차에 시동을 걸 듯, 농사에도 시동이 걸리는 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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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심으시려우~~~”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펜스 너머에서 이웃 사부가 날 보고 한 말이다.

‘감자??? 들깨 심겠다고 했는데 잊으셨나?’

올해는 들깨를 심어 기름을 짜고, 들깨꽃 튀김까지 야심 찬(?) 계획을 세운 후 들깨씨를 진즉에 부탁해 놓았었다. 가까이 다가가 들깨 이야기를 꺼내자 대뜸 말하신다.

“아~~지금 감자 심어서 캐고, 거기에 들깨 심으면 되지요~~”

앗! 얼치기 수준이 드러나는 순간이다. 사부 댁 광에서 싹이 터 쭈글쭈글해진 씨감자를 얻어 들고 돌아와서 가만히 생각하니 얼마 전의 일이 떠오른다. 그때도 밖에서 어슬렁거리며 정리하던 중이었다. 누가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아직 풀도 안 났는데 뭔 풀이라도 잡고 있는 거유?”

“옥수수 심었던 곳인데 정리하고 있어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주머니에서 작은 비닐봉지를 꺼냈다. “여기에 완두콩 심어 보시려우?” 그때도 나는 “여기 옥수수 심을 건데요?”라고 했다.

“아~~완두콩 심어서 수확하고 옥수수 심으면 되지요~~” 초록 구슬 같은 완두콩이 손에 건네졌다. ”두 알씩 심어요. 위로 자라니까 간격은 좁아도 되고, 나중에 지주대를 세워야 하니 지나다 나뭇가지 보이면 주워다 모아둬요”

밭을 비워 두지 않고 계속 이어 심는 것이다. 사부는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을 볼 때마다 이어 붙일 작물을 가지고 나오신 것이다. 어쩌면 농부가 작물을 심는 일은 시간을 이어 붙이며 계절을 건너가는 일과 다름 아닐지도 모르겠다.


아, 나는 언제쯤 작물과 시간을 이어 붙이며 스스로 계절을 건너가는 수준이 될 수 있을까

해마다 기록하는 텃밭 일지가 열 권쯤 쌓이면 가능할까

좋은 이웃을 가까이 두었으니 다섯 권쯤이면 가능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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