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바라보기’ 위해 밖으로 나간다. 밖은 고요하다. 그 고요 속에서 귀를 기울인다. 텅 빈 듯하지만 가득 차 있다. 갓 태어난 아기가 바라보기만 하듯 얼치기 농부인 나 또한 그렇게 본다. 어슬렁거리며 보고, 살피며 보고, 철저히 수동적인 태도로 그저 바라본다. '무위 속의 관조'랄까, 요즘 밖에서 어슬렁거리는 내 모습이다.
텃밭 농사 2년을 보내고 이렇게 그저 벌어지는 일들을 바라보기만 하는 시간은 처음이다. 작년에도 지금처럼 바라볼 수 있었을텐데, 어쩌면 내가 멈추지 않았기에 그 시간을 갖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무엇을 심을지, 어떻게 할지 오로지 나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추며 시간을 보냈다. 볼 시간은 분명 주어졌는데 내가 시간의 등을 떠밀어 보낸 셈이다. 이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서 ‘무엇이 벌어지고 있는가’를 보는 시간을 놓치지 않으려 한다. 틀림없이 그때의 선택에도 나름의 타당성과 정당성이 있었겠지만, 텅 빈 곳에서 약속된 충만한 생명력을 보지 못했다. 자연은 내게 어떠한 약속도 명시하지 않았지만 선물처럼 하나둘 내보이고 있다. 닭들을 밭에 풀어 놓고 바라보는 이 시간의 햇빛은 더욱 찬란하다.
고요 속의 침묵은 생명의 에너지를 더하고, 보고 들을 수 있도록 나의 감각을 끌어 올린다. 작년부터 적어 온 텃밭과 마당 일지를 펼쳐보니 이제 곧 꽃봉오리들이 폭죽처럼 여기저기 터질 것이다. 지금은 그 폭죽이 터지기 전의 고요다. 작년 10월 말 심었던 수선화와 마늘을 만난다. 묻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본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약속은 조용히 작동하고 있다.
세상의 질서 속에서도 약속은 작동한다. 때로는 기대 이상의 선물로 행복을 주기도 하지만, 기대와 믿음은 저마다 다르고 자기중심적이기에 그것이 나의 기대와 믿음에 일치하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결혼이라는 성스러운 약속조차 시간이 흐르며 기억 속에서 퇴색되고 관계마저 흐릿하게 만든다. 세상의 질서는 약속이라는 틀로 지탱되지만 그 안에서 주고받은 약속들은 인간의 바람과 의지와는 무관하게 자주 어긋난다. 허망함을 느끼는 이유다.
세상의 질서를 파괴하는 파렴치한도 있다. 전쟁을 ‘나들이’라는 언어로 왜곡하는 그는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사냥한다. 굳이 파괴되지 않아도 세상 질서의 허망함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 민낯 앞에서 나는 허망을 넘어 절망에 이른다.
자연 속에서 작동하는 약속과 세상 속에서 작동하는 약속은 분명 다르다. 세상의 약속은 인간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지만, 자연의 약속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한 질서 위에 있다. 이는 마치 신앙에서 약속을 믿음으로 붙잡는 것과 스스로 무언가를 이루려는 행위의 율법과도 닮아있다. 자연의 질서 속에서 작동하는 약속은 인간의 행위가 근거일 수 없음을 깨닫게 한다. 행위로 무엇인가를 증명하려 애쓸 필요가 없다. 행위는 자신을 드러낼 뿐이다. 율법과 행위는 양면 거울과 같아서 우리의 얼굴을 씻어 주지는 못하지만, 무엇을 씻어야 하는지 보여 준다. 그래서 해야 할 일을 알게 하고 그럼으로써 우리를 보호하기도 한다. 자연 속에서 인간의 행위 역시 생명들을 돌보고 보호하는 일이어야 하며 그것은 시중드는 역할에 가깝다. 생명을 만들어 내는 일은 인간의 몫이 아니기 때문이다.
신앙의 길에서, 그리고 텃밭을 일구는 얼치기 농부의 길에서 나에게 주어진 약속은 분명 존재한다. 그 약속은 현재 그리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나를 연결한다. 올 한해에도 나는 손바닥만한 텃밭을 가꾸는 얼치기 농부로서, 나의 행위가 보호와 시중드는 역할이 되도록 아낌없이 수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