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2024, 대한민국)
언젠가 그런 말을 들은 적 있다.
영화의 전체 흐름에서 우연은 딱 한 번만 적용되는 것이 제일 좋다고.
물론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개연성이며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우연이라고 부를지는 관객들의 기준에 따라 다르다.
때문에 사실 러닝타임 내내 우연적 사건이 딱 한 번만 발생하는 영화는 찾기 힘들다.
애초에 히어로 장르만 봐도 영웅이라는 캐릭터의 탄생 자체가 우연적인 경우가 많고 코미디 장르에서는 이 우연적 사건의 연속이 극을 이끌고 가는 중요한 장치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나름대로 이렇게 해석한다.
"극의 핵심이 되는 우연은 딱 한 번이 적당하다."
영화는 아니지만 이를 꽤 잘 대변하는 작품이 있다.
바로 2004년 연재작 <데스노트>이다.
안타깝게도 2부가 시작되고부터는 그러지 못했지만 1부에 한해서는 치밀하게 짜인 개연성 속에서 딱 한 번의 우연으로 이후의 모든 전개를 매끄럽게 이어나간다.
그 한 번의 우연이란 방송으로 키라에게 선전포고 중이던 가짜 L을 주인공이 충동적으로 살해해 버린 것.
이는 사실 악인만 처단한다는 그의 정의관에도 맞지 않고 아무런 의심 없이 생방송 중에 상대방을 제거하는 행동도 이후 보여준 지능적인 모습과는 꽤 대비된다.
하지만 이 우연적인 행동으로 L에게는 숨어있는 키라를 잡을 수 있는 핵심적인 단서를, 키라에게는 L을 제거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제시하면서 극은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
즉, "핵심적 우연"이란 극의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큰 도움이 되는 우연을 뜻한다.
이처럼 단 한 번의 핵심적 우연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관객들의 몰입과 영화적 재미를 동시에 높여주는 아주 고마운 역할을 한다.
물론 강박적으로 정확히 한 번의 우연만 전개될 필요는 없다.
우연성이란 말 그대로 희박한 확률, 논리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을 말하는데 정의와는 다르게 현실에서 그런 일들은 흔하게 일어난다.
그러니까 오히려 현실보다 더 드라마틱해야 하는 영화의 줄거리에서 우연이 딱 한 번만 나오길 기대하기는 힘든 게 당연하다.
무엇보다 서론에서 언급했듯이 우연에 대한 기준은 모두가 다르기 때문에 감독이 의도한 것과 관객이 해석하는 것 역시 다를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영화에는 극을 이끄는 핵심적인 우연이 두 번, 세 번이 될 수도 있고 그 가운데에 자잘한 우연적 사건들이 배치될 수도, 경우에 따라서는 데우스 엑스 마키나와 같은 장치로 극을 마무리해야 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우연의 연속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를 눈감아 줄 수 있다는 것 또한 아니다.
앞서서 말이 길었지만 <탈주>에서 우연을 쓰는 방식은 그다지 좋은 방식이 아니다.
인물 간의 만남, 주인공 버프 등의 클리셰들은 차치하고서라도 <탈주>에는 핵심적 우연으로 전개되는 경우가 너무 많다.
우연히 김동혁이 임규남의 탈주계획을 알아차리면서부터 영화 <탈주>의 사건은 시작된다.
우연히 어릴 적 임규남이 알고 지내던 리현상이 탈주사건의 담당자가 되어 임규남에게 기회가 생겼으며,
우연히 키가 꽂혀있는 차량을 발견한 임규남은 또다시 탈주를 감행할 수 있었다.
우연히 연료가 떨어진 상황에 김동혁이 잡혀있는 경무부로 향하는 군인들을 만났고,
우연히, 또 우연히, 또 우연히...
영화를 보며 굳이 묘사하기 귀찮은 모든 과정을 전부 우연이라는 쓰기 좋고 편한 카드로 메꾼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문제점이다.
위 나열한 몇 가지 우연들은 실제 극의 진행을 위해 꼭 필요한 것들이다.
임규남의 탈주 계획이 망가져야 극이 진행될 것이고, 이를 수습하기 위한 장치가 필요할 것이고, 어쨌든 탈주는 계속되어야 하니 이를 도와줄 수 있는 환경이 필요할 것이다.
좋은 영화가 이 중 하나, 많게는 두 개 정도 골라 우연적 사건을 배치하고 이 사건의 결과로 이후 전개의 개연성을 챙긴다면 탈주는 필요한 모든 장치에 우연적 사건을 배치한다.
덕분에 관객들은 저 인물이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해나 갈지를 궁금해하며 영화에 몰입하기보다는 배우들의 연기만 열심히 관람하는 꼴이 되고야 만다.
이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스릴러라는 장르가 추구하는 긴장감을 전혀 살리지 못하게 된다.
우연이라는 요소는 그 원인을 굳이 생각해두지 않아도 된다는 점에서 사용하기 굉장히 편리한 장치이다.
특정 사건을 전개함에 있어 반드시 갖춰야 할 원인과 결과 중 한 가지를 자연스럽게 포장할 수 있으니 글을 쓰는 입장에서는 그보다 좋은 것을 찾기가 힘들다.
하지만 그만큼 조심히 다뤄야 하는 것 또한 우연이다.
<데스노트>와 <탈주>의 사례에서 봤듯이 적절한 우연에 의한 전개는 극을 원활하게 흘러가도록 해주지만 과한 우연의 사용은 장르적 재미마저 사라지게 만든다.
모든 사건 하나하나에 개연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은 챙겨야 함이 옳다는 말이다.
<탈주>는 그 외의 것을 놓고 보자면 그렇게까지 나쁜 영화는 아니다.
어쨌거나 액션을 원하는 관객에게 괜찮은 수준의 액션을 보여줬고 인물들 사이의 관계에서 나오는 묘한 긴장감과 가끔씩 무거운 분위기를 환기시켜 주는 개그씬은 나름 완급조절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다만 이것들이 극 전개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고 그저 배우의 연기가 좋으니 좋았다 수준으로 끝나는 이유는 결국 모든 사건들이 우연히 발생하고 또 우연히 해결되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