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나는 천년만년 젊고 건강할 거라고 믿었지만, 40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온몸이 쑤시고 몸의 이곳저곳에서 나에게 안 좋은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결국 몸 안에 작은 종양들이 하나, 둘 생기기 시작했다. 그래도 악성종양이 아니라니 내심 다행이다 싶었고, 당장 목숨에 지장이 없다고 하니 통증이 있을 때마다 진통제를 먹어가며 그냥저냥 버티며 일하고, 아이를 돌보며 몇 년을 그렇게 흘려보냈다. ‘내 나이에 이런 종양 하나 없는 사람이 어딨어?’ 하면서. 그러나 진통제를 먹는 날이 점점 많아져, 한 달의 절반 이상을 영양제처럼 진통제를 먹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을 때는 이미 건강이 많이 악화된 후였다. 결국 몸 안에 자리 잡은 모든 종양을 제거해야 했고, 일상생활을 하기도 힘들어져 그렇게 수술을 받게 되었다. 싱가포르에서 일을 하며 아이를 돌봐야 하는 남편 대신, 입원 수속을 위한 보호자로 엄마가 동행하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와 시간을 보내는 것이 꽤 오랜만이었다. 간간이 엄마와 전화 통화도 하고, 안부 문자를 주고받는 것이 잘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나만의 착각있었을까? 엄마는 많이 야위고 늙어 있었다. 나를 보자마자 눈물을 쏟을 것 같은 엄마를 향해, 나는 괜찮다며 덤덤하게 말했다. “여긴 간호사 통합병동이니까, 엄마는 수속할 때만 동행해주고, 내일 수술실 앞에서 기다리다 내가 깨어나면 돌아가면 돼.” 나는 싱가포르에서 6시간을 날아와, 잠깐 호텔에서 눈을 붙이고 짐을 싸서 곧장 입원을 위해 병원으로 왔다. 이 순간에는 엄마와 나, 오롯이 둘 뿐이다. 익숙한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된다. “병원을 제때좀 가지, 뭐하러 이렇게까지 미련하게 버티냐. 아프면 아프다고 말을 해야지. 뭐가 그렇게 맨날 바쁘서 몸이 이 지경 될 때까지 놔뒀냐.” 그런 엄마의 잔소리를 뒤로 한 채, 나는 묵묵히 병실에 짐을 풀고, 옷을 갈아입고, 간호사의 안내를 받았다. “이제 보호자는 내일 수술 시간에 맞춰 오시면 됩니다.” 그렇게 엄마를 떠밀 듯 보냈다. 그리고는 곧장 딸아이에게 전화를 걸어 말했다. “엄마는 잘 도착했어. 학교 다녀오면 교복은 한쪽에 벗어두고, 휴대폰 많이 하지 말고, 숙제 밀리지 말고, 식사 거르지 말고, 아침에 늦게 일어나지말고 아빠말 잘 듣고 있어…” 내로남불이라고 했던가. 우리엄마가 하면 잔소리고 내가 하면 아이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엄마의 사랑스런 가이드? 풉…병원에 누워 생각하니 우습기 짝이 없다. 이내 왼팔에 엄청난 주사바늘들이 꽂히고, 내일 수술을 위한 검사들이 시작되었다. 내일 수술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병실에 홀로 누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병실 천장만 바라보는 정말로 오랜만의 가져보는 혼자만의 고요한 시간에 대한 그 정막을 느끼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메일을 확인하지 않아도 되고, 딸아이의 뒷치닥거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이 온전한 나만의 시간. 그렇게 잠이 들고, 눈을 떠보니 새벽부터 분주한 간호사들의 움직임, 호흡체크, 혈압체크, 체온체크… 그리고 보이는 엄마의 얼굴. 수술대에 올라 이동하는 동안 어느샌가 나는 엄마의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딸아이와 다닐 때는 매순간 손을 잡고 다니면서, 어느새 검버섯이 피어버린 엄마의 손을 이렇게 꽉 잡아본게 얼마만인지 나는 기억을 할 수 없었다. 유치원 재롱잔치에서 나만 바라보며 함박웃음을 짓던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초등학교 때 비오는 날이면 학교 앞에서 우산을 들고 나를 기다리던 엄마의 모습도 스쳐 지나갔다. 메이커 바지가 대유행이었을 때, 그거 하나 안 사준다고 뾰로통해 있던 나를 백화점에 데려가 막내 이모에게 빌린 카드로 아빠 몰래 6개월 할부로 계산해주던 엄마의 무표정한 얼굴이 떠오른다. 대학교 때는 친구들 다 유행처럼 어학연수 가는데 나만 안 보내준다고 시위하듯 밖에서 방황다가 늦은 시간에 집에 돌아왔을 때, 아무 말 없이 저녁 밥상이 차려져있던 그날도 스쳐간다. 내 마음을 몰라주는 엄마가 서운할 때도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누가 누구의 마음을 더 몰랐을까. 세월이 참 야속하다. 그리고 엄마의 손에는 울음버튼이라도 달린 것처럼, 손을 잡고 있는 내내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옆에 있던 간호사는 말했다. “위험한 수술 아니에요. 너무 긴장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래, 차라리 긴장의 눈물이라고 핑계를 대자. 싱가포르에 사는 게 뭐가 그리 특별하고 대단하다고, 이제 4년이 지났는데 엄마를 만난 횟수가 지금 이 열 손가락에 꼽을 정도라는게, 그리고 어느새 노인이 되어버린 엄마 앞에서 나도 엄마의 사랑하는 딸이라는 게 왜 이리 서럽고 가슴이 저릴까. 나도 언제가는 딸아이의 뒷모습만 바라보면 살아가야 할 날이 곧 올 텐데, 그때 엄마의 이 손이 사무치게 그리워지면 난 어쩌지. 수술방으로 향하는 길에, 내 머리속에는 온통 엄마 생각뿐이었다. 수술방 문이 열리고, 이제 엄마와 잠시 떨어져 수술대 위에 누웠을 때, 나는 대성통곡을 했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달랜다. “위험한 수술 아니에요. 수술 잘될 거예요. 예전처럼 건강해질 거예요.” 속으로 나는 말했다. 당연하지, 우리나라가 의료 강국인데, 내가 그걸 의심했을까. 하지만 지금 이순간은 이유가 뭐든 그냥 엉엉 울고 싶었다. 엄마, 엄마 하면서 울던 어린시절의 나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