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한잔

by 란어웨이

직장을 옮기고 처음으로 하이어링 매니저와 1:1 면담을 하던 날, 매니저는 믹스커피 두 잔을 들고 미팅룸으로 들어왔다. 커피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나에게 매니저는 물었다.

“어머, 커피 안 마셔요?”

“아, 아니요. 가끔, 아주 가끔 마셔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커피잔을 들었다. 그리고 인생 처음으로 커피 한 모금을 입에 가져다 댔다. 28년 만의 첫 커피였다.의외로 쓰지 않았다. 달짝지근하면서도 끝맛에 탄듯한 쓴맛이 혀끝에 남았다. 나쁘지는 않았지만, 굳이 두 번은 마시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나는 커피와 함께 새 회사에서의 첫날을 맞이했다. 다음 날, 회사 건물 1층 로비 한쪽에 큼지막하게 자리 잡은 스타벅스를 발견했다.고등학생 시절, 야간자율학습을 하다 졸리면 잠을 쫓기 위해 상상을 하곤 했다. 나만의 ‘미래의 멋진 나’를 떠올리는 거였다. 동기부여가 필요했을까. 나는 커리어우먼이 되어, 한 손엔 영문 신문을, 다른 한 손엔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들고 멋진 차의 문을 열며 출근하는 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게 당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세련되고 멋진 어른의 모습이었다. 그리고 입사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유명한 시트콤 이쁜 여주인공의 최애 음료여서였을까 호기심에 까라멜의 이름이 가진 커피는 어떤맛일까를 궁금해 하며 시작된 나의 카라멜 마키아토로 나는 진짜로 스타벅스의 단골이 되었다. ‘까라멜 마키아토’라는 이름도 예쁜 음료에 빠졌다. 아침마다 한 잔을 들고 사무실로 향했고, 점심을 먹고 난 후에도 어김없이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가 좋아서였을까, 아니면 사람들과 나누는 짧은 대화와 그 순간의 여유가 좋아서였을까. 돌이켜보면 그때부터 나는 ‘커피 러버’가 된 것 같다.처음엔 달달한 커피로 입문했지만, 지금은 아침엔 따뜻한 라떼 한 잔, 오후엔 나른한 시간에 마시는 아메리카노를 기다리는 내가 있다. 그 짧은 순간의 커피 한 모금이 주는 안정감이 좋아서.

커피를 처음 마셨을 때는 그저 생소한 맛이었다. 익숙하지도, 꼭 필요하지도 않았던 존재. 하지만 그 한 잔은, 생각보다 은근히 삶 속으로 스며들었다. 출근길에, 회의 전 대기시간에, 혹은 긴 하루를 마무리하는 야근의 끝자락에. 커피는 그렇게 틈과 틈 사이를 채우는 존재가 되었다. 바쁘고 숨 가쁜 하루 속에서 ‘천천히’라는 감각을 되찾아주는 신호처럼.커피를 함께 마신 시간 속에는 늘 누군가가 있었다. 상사의 잔소리보다 더 쓰디쓴 날에도, 커피 한 잔을 건네며 내 편이 되어준 동료가 있었고, 퇴사 전 마지막 인사를 하며 묵묵히 테이블을 마주해준 친구도 있었다. 낯선 출장지의 낯선 카페에서는, 그 향기 하나로 이상하게 마음이 놓이기도 했다. 그렇게 커피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조금 덜 어색하게, 조금 더 따뜻하게 만들어주었다.어느 날 문득, 나는 내 손에 들린 커피잔을 오래 바라보았다. 이젠 쓰고 달고를 따질 필요도 없이 익숙한 무게. 신입 시절, 무엇이든 완벽하게 해내야 한다는 강박으로 조급하던 나를, 그 커피잔은 조용히 달래주곤 했다. 시간은 흐르고, 이제는 나도 누군가의 선배가 되어 있다. 어느 회의 전, 신입이 어색한 손짓으로 커피를 내려오자, 나는 괜히 웃으며 말한다.

“이거, 생각보다 금방 익숙해져요. 커피도, 회사 생활도.”사실 나는 여전히 모든 것이 능숙하지는 않다. 일도, 인간관계도, 심지어 내 감정조차도 가끔은 낯설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는 안다. 아무리 정신없는 하루라도, 커피 한 잔의 여유만은 스스로에게 허락할 줄 알아야 한다는 걸. 그것이 나를 지키는 방법이자,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라는 걸.커피는 단순한 음료가 아니다. 나에게 커피란, 어른이 되어간다는 것의 또 다른 이름이었고, 치열한 삶 속에서 나를 잠시 쉬게 해주는 작은 ‘정지 버튼’이었다. 나는 오늘도 커피를 마신다. 어제와 비슷한 하루지만, 매일 조금씩 다른 마음으로. 그렇게 커피와 함께, 나는 매일 조금씩 성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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