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4년 만에 영화 '파과'로 세계의 주목을 받은 한국의 소피아 로렌
1990년 영화 <땡벌>로 제35회 베를린 국제영화제에 참석했던 배우 이혜영이, 40년만인 2024년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베를리날레 스페셜 부문에 공식 초청받아 다시 베를린을 찾았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나는 마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보석을 다시 만난 듯한 전율을 느꼈다. 무엇보다도 60대 킬러를 연기한 그녀의 강인하고도 쓸쓸한 얼굴이 담긴 포스터는 말 그대로 압도적이었다. 한 장의 이미지가 이토록 깊은 울림을 줄 수 있다니. 나는 그날, 다시 이혜영이라는 이름을 가슴에 새겼다.
올해로 예순넷, 나는 어린 시절 텔레비전 속에서 수많은 배우들을 봐왔지만, 그중에서도 이혜영은 단연코 ‘다른 사람’이었다. 어떤 배우는 예쁘고, 어떤 배우는 귀엽고, 또 어떤 배우는 연기를 잘했다. 그런데 이혜영은 그 모든 것 위에 ‘존재감’이라는 말을 새겨 넣은 사람이었다. 그 강렬한 눈빛, 낮고 단단한 목소리, 그리고 무심한 듯 세상을 관통하는 듯한 시선은 한참 어린 나에게 ‘여자도 이렇게 멋질 수 있구나’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심어주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런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종종 외로웠다. "이혜영 진짜 멋있지 않아?"라고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은 늘 "나는 000가 더 좋던데"였다. 그 시절, 사람들은 여전히 키가 작고 피부가 하얗고 눈이 큰 ‘전형적인 미인’에게 열광했다. 개성 있는 얼굴은 ‘튀는 외모’였고, 강인한 분위기는 여성스러움과는 거리가 멀다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이혜영이라는 배우는 시대보다 너무 앞서 있었다. 예쁘기보다는 아름다웠고, 귀엽기보다는 강렬했다. 요즘 들어 장윤주나 변정수처럼 개성 있는 외모와 분위기를 무기로 여러 영역을 넘나드는 여성들이 활약하는 걸 보면, 결국 모든 사람에게는 ‘자신의 시대’가 오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영화배우 이혜영, 그녀의 시대는 지금이다.
이혜영은 다양한 작품 속에서 강인하고 주체적인 여성상을 그려왔다. 특히 임권택 감독의 영화 <티켓>(1986)에서는 다방 종업원으로 분해, 당대 사회의 시선과 생계의 현실 사이에서 버텨야 했던 여성의 삶을 깊이 있게 표현했다. 이 작품에서 그녀는 하층민 여성들이 지닌 질긴 생명력과 당당함, 그리고 삶의 바닥에서도 품위를 잃지 않으려는 마음을 담담하면서도 단단하게 연기하며 관객과 평단의 주목을 받았다.
이어 1988년 <성공시대>에서는 야망과 상처를 동시에 품은 도시 여성 '현주'로 등장해 냉정하고도 치명적인 매력을 보여줬다. 단순한 로맨스의 상대가 아닌, 삶을 스스로 개척하는 인물로서의 존재감을 드러낸 이 작품으로 그녀는 제25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자 최우수연기상을 수상했다. 외적인 아름다움보다 내면의 힘으로 스크린을 장악하는 그녀의 연기는 이 시기부터 이미 특별했다.
1988년작 <사방지>에서는 양성의 성을 모두 지닌 실존 인물 사방지를 연기하며, 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도전적인 캐릭터를 완성했다. 여성의 몸을 지닌 채 남성으로 살아야 했던 인물의 고뇌와 욕망을 표현하며, 이혜영은 단지 배우가 아니라 금기를 마주하고 해체하는 예술가로 평가받았다. 당시로서는 전례 없이 파격적이었고, 이 작품은 그녀의 배우 인생에 있어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021년 홍상수 감독의 <당신 얼굴 앞에서>에서는 오랜 공백 후 돌아온 전직 배우 ‘상옥’을 연기하며 다시 한 번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사보다 시선과 호흡, 침묵으로 감정을 전달하는 이 작품에서 그녀는 지나온 삶의 무게와 회한, 평온한 체념까지를 고스란히 담아냈다. 제58회 백상예술대상 영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그녀는 단지 복귀가 아닌, 정점에 다시 오른 배우로 주목받았다. 수상소감에서 “이번엔 부끄럽지 않았다”고 말하던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내 마음을 울린다.
"제가 연기한다는 모습은 지켜본다는 게 때로는 부끄럽고 때로는 후회가 돼서 그냥 조용히 일어나서 극장문을 나섰던 적이 여러 번 있었거든요. 그런데 '당신 얼굴 앞에서'는 제가 부끄럽지 않았어요 그래서 꼭 받고 싶었어요. 이런 기회가 저에게 그렇게 많을 것 같지 않아서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저를 불러주셨어요. 정말 감사합니다. (트로피를 들면서) 저 이거 잘 쓸게요."
작은 떨림을 느낄 수 있었던 호흡과 목소리, 감격에 가득한 화장기 별로 없는 없는 관록이 엿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이번 수상으로 상기되어 있었다.
올해, <파과>로 다시 한 번 그녀는 주목을 받고 있다. 60대 여성 킬러를 연기하며, 나이와 성별의 경계를 뛰어넘는 강인한 여성상을 보여준다. 이번 작품을 연출한 민규동 감독은 <내 아내의 모든 것>, <간신>, <허스토리> 등을 통해 여성 캐릭터의 내면을 섬세하게 다뤄온 연출가로, 특히 시대의 억압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를 잃지 않는 여성들의 이야기에 탁월한 감각을 보여왔다.
그는 최근 인터뷰에서 이혜영의 캐스팅 이유에 대해 “어렸을 때부터 이혜영 배우는 내게 신비로운, 미스터리한 배우였다”며 “한국적이지 않으면서 궁금한 지점이 오랫동안 쌓여있었다. 고전적인 아우라를 가진 분이 ‘파과’의 조각 역에 어울릴 것 같았다”고 밝혔다. 이어 “직접 만났을 때 운명적임을 느꼈다. 실제 조각을 구현한 것처럼 떨림도 있고 강렬함도 있었다. 살아온 흔적과 에너지, 아우라가 첫 만남 때부터 느껴졌다. 이혜영 배우가 오랫동안 ‘파과’를 준비한 느낌이었다”고 덧붙였다. 이혜영은 그 무게 있는 인물을 완벽하게 소화하며, 자신만의 색으로 완전히 물들였다.
지난 3월,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 레드카펫에 선 그녀는 금발 머리에 스트라이프 슈트를 입고 시크하고 당당한 카리스마를 내뿜었다. 드레스가 아닌 슈트를 선택한 그녀의 모습은 너무도 이혜영다웠고, 그 자체로 영화 같았다. 현지 영화 관계자들은 "그녀는 단지 배우가 아니라 한 장면 그 자체였다"며 감탄했고, 베를린에 참석한 해외 매체 기자들 또한 "고전적인 우아함과 현대적인 강인함이 공존하는 드문 존재"라고 그녀를 표현했다. 한 관객은 SNS에 "그녀가 걸어 들어오자 공기가 바뀌었다"고 썼을 정도였다. 한 시대의 여배우가 아닌, 한 세기의 얼굴처럼.
오는 5월, <파과>가 국내에서 상영된다. 60대 여성 킬러가 과거의 상처와 트라우마를 딛고 삶의 의지를 회복해가는 과정을 담은 휴먼 느와르 드라마로 은퇴 후 홀로 살아가던 전직 킬러가 어느 날 마주한 살인의 제안 앞에서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돌아보며 다시 삶의 방향을 결정하게 되는 이야기다.
이 작품은 단지 새로운 도전이 아닌, 지금까지 그녀가 선택해온 캐릭터들의 연장선에 있다. 하층민 여성의 현실을 담담히 그려냈던 <티켓>, 시대의 금기를 정면으로 마주했던 <사방지>, 삶의 깊이를 담아낸 <당신 얼굴 앞에서> 등, 이혜영이 그간 축적해온 ‘강인한 여성’의 계보가 <파과>라는 작품 안에서 다시 한 번 응축되어 폭발하는 것이다.
대중적으로는 자주 볼 수 없었던 그녀지만, 작품 하나하나가 그녀의 존재를 입증해왔다. 나는 바란다. 한국의 소피아 로렌처럼, 나이 들어도 더욱 빛나는 이 배우를 스크린에서 더 자주 만날 수 있기를. 누군가는 그녀를 이제야 알아보겠지만, 나는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이혜영이라는 이름의 무게를. 그리고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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