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있는 모든 것은 상처 입고 아름다운 흉터를 가진다.
'상처를 극복한 나무만이 도마로 활용될 자격을 얻는다.'
내가 아는 도마 만드는 장인이 하는 말이다. 사월동에서 도마를 만든다고 사월도마라는 이름으로 붙이고 나무를 깎고 다듬는 그이다. 사실 무슨 뜻으로 말한 건지 잘 알지 못한다. 상처를 극복한 나무는 경도가 더 강해져서 무수한 칼날을 잘 견딜 수 있게 된다는 것인지, 아니면 물성이 달라져서 물이 많이 닿는 도마로써 더 적합한 쓰임이 된다는 건지, 그것도 아니면 나무가 상처를 입게 되면 독특하고 아름다운 나뭇결 무늬를 만들게 한다는 것인지.
모든 나무는 자려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는다. 치명적인 상처가 아니라면 스스로 치유하게 된다. 방어벽을 만들어서 미생물의 침입을 막는 것이다. 상처 가장자리의 부름켜에서 새로운 세포인 유합조직을 만들어 상처 부위를 감싸기 시작하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병원균과 혼자만의 전쟁을 치르게 되고, 이러한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면서 나무는 안으로 더 단단해지게 된다.
저마다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 흉터가 된다. 그리고 흉터는 다시 나무가 하늘을 향해 자랄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나무의 흉터는 그 나무의 삶이고 생존의 기록이다. 그렇기에 나무의 상처는 아름답다.
우리의 삶도 나무와 같다. 상처를 입지 않고 사는 영혼이 어디 있으랴. 살면서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되고 치료를 하게 된다. 치유를 통해 우리는 다시 내일을 살 힘을 얻는다.
아픔 속에서만 머물러 있다면 오늘도 내일도 고통의 연속이다. 어두운 심연 속에 갇히게 된다. 절대 괜찮은 듯 넘어갈 수는 없다. 극복하지 못한 상처는 잠재의식 속 깊숙이 숨어있다가 언제든 다시 트라우마로 발현되기 마련이다. 다시 마주하게 된 고통은 그전보다 더 아프다. 고통 속에서 우리는 또다시 좌절하게 되고 극복하는 것은 더 어려워지게 된다.
삶은 참 이분법적이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내가 있으면 네가 있다. 곡선이 있으면 직선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슬픔도 있다. 그러면서 우리는 한쪽면은 정답, 다른 면은 오답, 아니면 나쁜 것으로 정해 버린다. 무엇이 참이고 무엇이 그르다는 것일까.
참과 거짓은 없다. 그렇게 만들어 놓은 인간만 있을 뿐이다. 빛으로 인한 그림자가 왜 나쁜 것인가. 여름철 나무그늘은 우리에게 시원함을 준다. 그래서 그늘을 찾아 걷지 않는가. 시험에 떨어져서 슬픈가. 그러나 그 시험은 당신이 간절히 원했던 것인가, 아니면 부모님이 당신에게 원했던 것인가? 무엇이 슬프다는 것일까. 부모님이 돌아가셔서, 친구가 나에게 오해를 하고 화를 내서? 오랫동안 병마와 싸우신 아버지, 어머니는 죽음을 통해서 다시 자유로운 삶을 찾았을 수도 있다. 오해하고 화내는 친구는 어쩌면 내 옆에서 나를 가스라이팅하면서 나의 의지를 약하게 하고 자존감을 떨어뜨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일찍 관계를 정리하게 된 게 어쩌면 나에게 다행일 수 있다.
미성숙하기 때문에 균형 잡힌 사고를 하지 못하고 삶의 한쪽 면만 바라보며 사는 것이다. 이는 편협한 삶이다. 가진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못하고 가지지 못한 것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삶이다. 이는 혼자 있으면 누군가와 같이 있기를 원하고, 같이 있으면 혼자 있기를 원하는 만족을 모르는 삶이다. 미성숙해 있으므로 어떤 상황에 처해있느냐에 따라 감정이 계속 요동치는 것이다.
감정의 노예가 된 삶이다. 자신의 감정에 휘둘려 충동적으로 생각하게 되고 생각하던 대로 행동하게 되면서 실수를 반복하게 된다. 부정적인 감정이 나를 지배하게 되고 이는 관계를 악화시킬 뿐만 아니라 끊임없는 스트레스와 불안 속에서 하루하루를 살게 된다. 변화가 필요한 것을 알지만 두려움 때문에 용기를 내지도 못하고 삶의 주체성을 잃게 된다.
지금의 고통은 고통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 너머에 있는 생각을 전환하면 알 수 있는 것을 생각해 보자. 지금 나는 주목받는 일을 하지 못해서 조직 내에서 존재감이 떨어졌지만 덕분에 개인적인 시간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시간 결정권이 증가하였다. 나에게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을 통해 더 성숙하고 더 변화해야 하는 것이 나의 몫이다. 그러나 이 순간을 이기지 못한다면, 더 나은 나로 태어나기 위해 알차게 보내지 못한다면 지금은 불행은 또 다른 불행을 가져오게 되겠지.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듯이 절망이 있으면 희망도 있다. 삶은 이렇듯 이분법적으로 모든 것을 설계하였다.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볼 것인가는 각자의 몫이다. 성찰을 통해 아픔을 극복한 사람만이 내일이라는 기회를 다시 가지게 된다. 다시 행복해질 권리를 얻게 된다. 상처를 극복한 나무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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