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의 감동보다는 기억에 관한 글
부모님은 제가 군대를 제대한 2002년 전후로 경기도 가평에서 펜션을 시작하셨어요. 그 펜션의 이름이 바로 랑세입니다. 아버지가 랑세라는 필명을 쓰시는 이유기도 하지요. 십 년 넘게 운영하면서 희로애락은 켜켜이 쌓여갔지만, 어느덧 이제는 힘에 부치다는 걸 깨닫고 마침내 펜션을 처분하신 뒤 다시 서울로 올라오셨죠. 그리고 또 한 십 년을 저희 가족 근처에서 거주하시며 손주를 사랑과 정성으로 돌봐주셨습니다.
처음엔 이수역 근처에 자릴 잡으셔서 저희가 육아 도움을 받기 위해 이수역 근처로 따라 이사 갔습니다. 이후 저희가 반포로 이사 오면서 이번엔 부모님이 저희와 같은 아파트 단지로 옮기셨어요.
반포로 이사하면서 아버지가 괜찮은 스피커를 장만하고 싶다고 하시더군요. 클래식 음악 애호가이신 어머니께 보다 좋은 사운드로 베토벤과 모차르트를 들려주고 싶으셨나 봐요. 한 때 오디오라는 취미에 잠깐 흥미를 가진 적이 있어서 입문용 수준으로 스피커와 앰프, 미디어 플레이어, 턴테이블 정도의 구성으로 세팅시켜 드렸습니다.
부모님 댁에 설치된 오디오는 콤팩트한 사이즈를 비웃으면 안 된다는 듯 꽤 괜찮은 소리를 내어 만족스러웠습니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어느 작곡가의 교향곡을 듣고 있던 그때를 생각하다가 어릴 적 아파트 거실 한편에 놓여있던 전축이 불현듯 떠오릅니다.
전축, 좀 더 정확했던 표현은 스테레오였던 것 같고, 어쨌든 쉽게 생각하면 지금 오디오라고 부르는 그것입니다. 그래도 전축이 뭔지 모르겠다는 분들께 간단히 설명드리자면 스피커와 튜너, 앰프, 그리고 카세트테이프와 LP 같은 미디어 재생기로 구성된 음향기기입니다. 이것들이 건물처럼 층층이 쌓여있는 디자인이 특징이죠. 디지털이란 단어도 나오기 전이었기 때문에 ‘블루투스 연결’이라는 말이 먹는 건지 입는 건지도 몰랐을 시절이었습니다. 기억을 떠올려보니 제가 고등학교 입학할 때 즈음 CD라는 매체를 플레이할 수 있게 한 번 업그레이드하셨던 것 같아요. 어머니가 장장 60여 장에 달하는 클래식 음악 CD 전집을 구매하신 기억이 있거든요.
저희 집에 있던 전축은 당연히 두 개의 카세트테이프를 넣을 수 있는 더블 데크였어요. 워낙 레트로 컬처가 유행이라 젊은 친구들도 이제 카세트테이프가 뭔지 많이들 압니다. 더블 데크가 있으면 나만의 믹스 테이프를 만들 수 있습니다. 여러 카세트에 들어있는 음악들 중에서 내 입맛대로 골라 비어있는 테이프에 한 땀 한 땀 녹음하는 거죠. 영화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의 주인공 스타로드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로 듣던 그 테이프 생각하시면 됩니다.
SONY를 8~90년대 전 세계 No.1 전자제품 회사로 만든 1등 공신이 WALKMAN, 바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입니다. 제가 중학교 다닐 때 다들 하나씩 갖고 있었던 필수템이었죠.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는 휴대용 CD 플레이어와 MP3 플레이어를 거쳐 이젠 그 역학을 스마트폰으로 넘겨줬네요. 세월이 이렇게나 빠릅니다.
저도 중학교 2학년인가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를 갖고 싶어 부모님을 졸랐습니다. 삼성전자의 마이마이(mymy) 같은 국산 제품도 있었지만 그때 힙해 보이기 위해선 무조건 일본 제품이 필요했습니다. 그렇게 어느 날 아버지가 깜짝 선물로 사 오신 제품은.. 비록 일본 AIWA라는 브랜드의 제품이었으나 두께가 너무 두꺼웠어요. 당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멋짐 기준은 얼마나 얇은가였거든요. 선물 받고도 속상했던 기억이 나는 걸 보니 저도 그땐 참 어렸습니다. 지금 사춘기 제 아들 뭐라 할 처지가 아니네요.
서태지와 아이들과 Nirvana를 즐겨 들었던 철없는 보통의 중고딩이었지만 한편엔 어머니의 영향을 반 즈음받았는지 클래식 음악과 결이 비슷한 영화음악도 좋아했습니다. 가을의 언덕 OST와 엔리오 모리코네의 영화 Mission OST처럼 감동적인 음악들뿐만 아니라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언킹 OST도 추억 속 멜로디들이네요.
특히 샤인(Shine)이란 영화의 OST는 정말 잊히질 않습니다. 우리에겐 영화 ‘캐러비안의 해적’의 바르보사로 친숙한 제프리 러시가 정신분열증으로 고통받는 피아니스트로 출연하는데 실존 인물을 모티프로 했다고 들었어요. 영화를 관통하는 라흐마니노프의 곡들이 조금은 우울한 느낌인데, 어느 한 장면에서 ‘Gloria’라는 곡이 나옵니다. 주인공이 구름 한 점 없는 이른 아침 버버리만 걸친 채로 휴대용 카세트 플레이어의 헤드셋에서 흘러나오는 이 노래를 들으며 집 뒷마당 트램펄린 위를 방방 뛰는 장면이 억압되었던 마음의 속박을 끊어내는 것만 같았죠.
전축으로 이 노래를 믹스 테이프에 녹음하던 그때가 전 아직도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영화의 그 장면처럼 이른 아침이었는데 거실에 저 말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주말은 아니었고 아마 개교기념일처럼 학교를 안 가는 날이었던 것 같아요. 전축 앞에 쭈그리고 앉아 더블 데크를 만지작거리던 어린 시절의 제 위로 거실 옆 베란다를 통해 쏟아지던 햇빛의 따스함을 잊지 못합니다.
아버지가 가족들의 사진 찍는 걸 좋아하셔서 혹시 당시 거실에 놓여있던 전축이 나왔을 법한 사진을 찾아봤는데 아쉽게도 없네요. 괜히 이 글에 쓸 사진 하나 건지겠다고 앨범을 펼쳤다가 젊은 시절 아버지 모습보고 눈물만 쏟았습니다.
주저리주저리 적다 보니 이번 글은 ChatGPT가 아버지께 정해준 28번째 키워드인 음악의 감동보다는 음악의 기억에 더 알맞은 글이 되어버렸네요. 확실히 경험과 음악 사이의 기억은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아요. 작년 이 맘 때 부모님과 크루즈 여행을 준비하면서 애플 뮤직의 ‘편안한 클래식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자주 들었거든요. 오늘도 이 글을 쓰면서 듣고 있는데 음악 덕분인지 유독 아버지가 생각나는 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