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027 좋아하는 색깔

그 어느 색깔보다 눈부셨던 아버지의 무채색 자켓

by 랑세

아버지는 검소하셨습니다. 사치라는 걸 모르고 사셨어요. 오죽했으면 어머니가 ‘결국 돈 한 번 제대로 쓰지도 못하고 가셨다. 돈을 참 쓸 줄 모르는 양반이었다’고 하셨을까요.


부모님 모두 직장을 다니셨고 저와 동생은 딱히 어려움 없이 커서 그 시절 우리집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었지만, 돌이켜보면 두 분 모두 자신을 위한 소비에는 매우 엄격하셨던 것 같아요. 아버지 죄송합니다. 오늘도 온라인에서 충동적으로 구매 버튼을 누른 제 자신을 반성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도 가끔 플렉스하신게 있으니 바로 외식이었습니다. 생일이나 기념일마다 부페나 분위기 좋은 식당을 종종 데려가 주시고는 했어요. 한 번은 업무상 접대 자리에나 어울릴법한 일식당을 데려가 주신 적이 있는데 전 이때가 그렇게나 기억에 남습니다.


동네 저렴한 횟집에서는 테이블 위에 이것저것 젓가락질할만한 접시들을 많이 올려주잖아요? 그런데 그 곳은 사시미의 퀄리티에만 힘을 준 식당이었는지 흔히 스키다시라 부르는 주변 요리들이 거의 나오지 않더라구요. 아버지는 애들이 좋아할만한 음식이 같이 나오지 않자 당황하셨는지 종업원을 불러서 ‘뭐 좀 더 먹을거 없냐, 양이 안찬다’고 다그치시더라구요. 그 땐 같이 얼굴이 붉어졌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꽤 귀여우셨네요.


어쨌든 검소함은 제 아버지를 대변하는 키워드 중 하나였고 특히 꾸미는데 정말 관심이 없으셨어요. 제 기억 속 아버지의 옷 색깔은 전부 다 회색에서 검은색 사이 어딘가입니다.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떠올린다면 네이비 정도? 그 시절 아버지들의 전형적인 모습이라고 하기에도 좀 과했죠.


다행인지 불행인지 유전은 아닙니다. 이미 중학교 시절부터 엄마가 골라주는 건 싫다며 친구들이랑 옷 사러 다니기 시작한 아들이 접니다. 아차, 이제 고등학교에 입학하는 제 아들이 매일같이 검정색 츄리닝만 고집하는 걸 보면 패션에 대한 할아버지의 무관심이 손자로 한 세대 건너 내려왔을 수도 있겠다 싶네요.


그렇다고 취향이 없는건 또 아니셨어요. 옷의 길이나 소재를 은근히 따지셨고 신발은 발모양에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불편해서 안된다고 하셨죠. 뒷 산을 산보삼아 자주 다니셔서 한 번은 괜찮은 등산 브랜드에서 바람막이 자켓을 사다드린 적이 있어요. 짙은 회색에 품도 넉넉한 사이즈로 구매했는데 두어달 뒤에 어머니가 저 입으라고 가져오시더군요. 밋밋한 디자인에 디테일 한 꼬집으로 들어간 오렌지 컬러가 아버지에겐 좀 튀어 보이지 않았나 짐작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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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보내드리고 며칠 뒤 부모님댁에 들렀다가 무심코 아버지 옷장을 열어봤습니다. 예상대로 우중충한 색깔의 옷들뿐이더군요. 옷들을 뒤적이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듭니다. 어쩌면 아버지는 처음부터 무채색의 자켓과 바지를 좋아하셨던게 아니라 아이들에게 좀 더 좋은 것을 먹이고 입히기 위해 당신이 무엇을 걸치는지 신경쓰지 않기로 마음 먹으신게 아닐까 하구요.


맞네요. 아버지의 30대 시절 날씬한 몸매로 청바지 핏을 뽐내던 사진이 불현듯 기억 저편에서 떠오릅니다. 크루즈 여행을 모시고 갔을 때에도 5월 날씨에 어울리는 까실까실한 소재의 녹색 자켓을 가져오셨는데 잘 어울리시더라구요. 아버지한테도 한때 멋이란게 중요했던 시절이 있었고 이제 나이가 들어 다시 그 기억을 끄집어 내고 계셨을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사진 속 아버지의 무뚝뚝한 자켓 색깔에서 비로소 눈부신 빛이 납니다.


좋아하는 색깔보다 가족을 더욱 소중히 여겼던 아버지 생각에 또다시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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